안희정 2심 재판부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선 안 돼”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1.01.29 10:00
  • 호수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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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해 온 사회적 편견에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묵직한 메시지를 던졌다. 장 의원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밝히며, 가해자인 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책임을 물었다. 장 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피해자다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략) 일상을 회복하는 방법에도 ‘피해자다움’은 없습니다. 수많은 피해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상을 회복합니다. (중략) 이 모든 과정에서 그 어떤 피해자다움도 강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 의원이 거부한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일까. 여성학에 따르면 성범죄의 피해자다움은 피해자가 갖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속성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왜 더 저항하지 못했나?” “왜 즉시 신고하지 않았나?” “피해를 당하고 어떻게 가해자와 일을 할 수 있느냐?” 등 성폭력 피해자들이 흔히 듣는 질문이다.

2018년 8월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판결 직후 여성단체들이 피해자다움을 엄격하게 따진 재판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연합뉴스
2018년 8월14일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판결 직후 여성단체들이 피해자다움을 엄격하게 따진 재판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연합뉴스

여성학계는 오랫동안 피해자다움을 ‘가부장제·주류사회가 구축한 신화에 불과하며, 불합리하다’고 지적해 왔다. 김선희 이화여대 초빙교수가 저술한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다움’이란 있는가?》에 따르면 ‘피해자다움의 전형적인 행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건 이후 피해자가 취할 수 있는 행위는 개별적으로 다양하고 일반화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다운가, 답지 못한가를 따지는 것은 인신공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로 이어졌다. 실제로 특정 정치 세력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답지 않다’며, 각종 조롱과 비판을 쏟아냈다.

오랫동안 피해자다움은 성폭력 재판에서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도 작용했다. 안 전 지사의 비서 성폭행 재판 1심에서는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게 무죄 판결의 주된 근거였다. 법조계에 따르면 권력 관계에 기인한 성범죄가 처벌이 쉽지 않은 건 피해자의 상황과 특수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다움을 지나치게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최근 피해자다움을 깨뜨리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안 전 지사에게 실형을 선고한 2심 재판부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2020년 11월16일, 대법원도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웃음을 지었다’ ‘피해자답지 않게 행동했다’는 이유로 가해자한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번 장 의원의 대응에 지지와 연대의 목소리가 쏟아진 건 그가 피해자다움을 처음으로 거부해서다. 이 때문에 일부 언론은 장 의원의 대처가 새로운 성범죄 대응 매뉴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다수의 여성활동가는 이런 평가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대표는 “장 의원 사례를 성범죄 대응 매뉴얼이라고 규정짓는 건 맞지 않다. 장 의원은 피해 사실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존엄을 찾았지만, 그렇지 않고 조용히 해결하려는 피해자들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폭력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개인의 대처보다는 공동체 혹은 조직에서 2차 가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결해 나가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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