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방생 윤석열, 김선수의 사시 합격을 위해 이종찬을 만나다
  • 전영기·이원석 기자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4.02 10:00
  • 호수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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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법대 79학번 윤석열·김선수·이철우 연쇄 인터뷰...5공 시절 그들의 고뇌와 우정 이야기

서울법대 1979년 입학 학번 사이에 소문으로만 떠돌던 80년대 청년들의 고뇌와 우정의 이야기가 ‘윤석열 정국’에서 부상했다. 그 주인공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61)과 민변 회장 출신의 김선수 대법관(60), 그리고 당대의 실세였던 이종찬 전 의원(85)의 아들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1)다.

ⓒ일러스트 신춘성

소문의 내용은 이렇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친밀하며 14명의 대법원 구성원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인사로 평가받는 김선수 대법관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1985년 사법시험 3차면접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때 같은 사법시험의 2차 낙방생이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동기생인 김선수를 데리고 당시 권력 실세였던 이종찬 민정당 의원에게 선처를 호소했다는 얘기다. 이 호소가 먹혀 김선수는 실력대로 사시 최종 수석합격의 영광을 안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윤석열이 야권의 대통령 후보감 1순위에 올랐고, 김선수는 ‘김명수 대법원’의 영향력 있는 주류 대법관으로 안착해 두 사람의 정치적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20대로 되돌아가면 청년들이 나눈 우정과  의리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 준다. 

스토리의 사실성은 쉽게 확인되지 않았다. 1979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한 160명 학생 가운데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나 김선수 대법관과 개인적으로 친하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해 물어봤지만 누구도 속 시원하게 답변해 주지 못했다. ‘윤석열이 김선수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데 도움을 줬다더라’는 내용 자체가 민감한 데다 설사 풍문으로 알고 있다 해도 확인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살짝만 어긋나게 진술해도 자칫 자기 분야의 정상에 있는 당사자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사안이어서 주변인들은 좀처럼 취재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김선수 대법관ⓒ시사저널 박은숙

사시 수석의 주인공 김선수 대법관, 시위 전력으로 떨어질 뻔 

결국 당사자들을 직접 취재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김선수 대법관을 접촉했다. 김 대법관과의 첫 통화는 3월26일 금요일 오후 이뤄졌는데 대법원 자기 사무실에서 판결 자료를 읽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김 대법관은 1985년 이종찬 의원을 찾아갔다는 사실과 이 의원의 도움으로 사법고시 3차에 최종합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역할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이종찬 의원과의 만남은 이 의원의 아들이자 서울법대 동기생인 이철우 연세대 교수가 주선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지요.

“나는 시위 때문에 강제징집돼 군에서 녹화사업(전두환 정권 때 운동권 학생을 건전한 학생으로 교화한다는 국군보안사령부의 프로그램)을 받은 전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3차 면접시험 때 신원조회로 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실제로 그 몇 해 전에 한인섭 선배(현 서울대 교수)가 시위 전력을 이유로 3차에서 탈락한 사례가 있었어요. 그래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2차 합격자 몇 명과 함께 이철우의 아버지인 이종찬 여당 의원을 찾아가 부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선수 대법관은 얼마 뒤 이종찬 의원으로부터 “일이 잘 처리되었다.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세월이 너무 흘러서인지 친구 윤석열의 역할에 대해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민정당 원내대표 등을 지낸 이종찬 전 의원ⓒ시사저널 임준선

윤석열 “선수 데리고 철우 아버지 만나 신원보증 부탁” 

3월27일 토요일. 이번에는 서초동 자택에 있던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교신했다. 그는 외부 인사와 공개적인 만남을 피하고 있는 편인데 김선수 스토리에 대해서는 스스럼없이 인터뷰에 응했다. 윤석열 전 총장의 기억은 비상할 정도로 세밀했다. 특유의 괄괄한 목소리로 그림 그리듯 36년 전 상황을 묘사했다.

윤 전 총장이 김선수 대법관의 3차 합격을 도와줬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맞는 얘기인지요.

“내가 도와준 게 아니라 이종찬 의원께서 하신 겁니다. 1985년 가을, 나는 사시 2차에서 떨어졌고 김선수는 붙었는데 선수의 시위 경력 때문에 3차가 걱정되어 선수를 데리고 이철우의 아버님인 이종찬 의원을 찾아뵈었지요. 이종찬 의원님은 1980년대에 집권당 원내대표, 정무장관, 사무총장 등을 지낸 정치 실세셨습니다. 이 의원께서는 그 전에도 조영래 선배(1971년 사법연수원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 쫓겨난 뒤 1981년 복직함. 그 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민변을 창립하고 43세에 세상을 떠남)처럼 민주화운동 때문에 사법시험에 붙고도 연수원에 못 들어간 사람들의 법조계 진출에 애를 많이 쓰셨지요. 5공 시절 시위 경력자들의 사시 3차 통과 및 연수원 입소는 대부분 이종찬 의원이 하신 거라고 보면 될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종찬 전 의원을 만났습니까.

“당시 친구 이철우 교수는 석사장교 시험에 합격해 경북 영천의 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철우가 신문 보도를 통해 김선수가 2차에 합격한 사실을 알고 나한테 전화해 선수를 데리고 아버지한테 가보라고 하더군요. 철우는 저와 보문동의 대광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54년 친구로 집안끼리도 가족처럼 지내던 사이였어요. 그래서 어렵사리 김선수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그에게 명동 세종호텔 로비에서 만나자고 연락했지요. 거기서 선수를 만나 이종찬 의원 댁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그때 이 의원의 집은 남산 1호터널 부근 필동에 있었지요. 이 의원한테 선수가 합격했는데 3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선처해 달라고 부탁드렸지요. 의원님은 선수의 신원보증을 섰고 요로에 얘기해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철우 아버지(이종찬)께서 나서지 않았다면 선수의 3차 통과를 장담하기 어려웠고 그랬다면  수석합격의 실력도 묻혔을지 모르지요.”

본인은 낙방했는데 친구의 합격을 위해 이리저리 뛸 때 심경이 좀 쓰라리지 않았나요.

“하하하. 그렇진 않았어요. 다음에 붙으면 되는 거지요(윤석열은 김선수의 합격 6년 뒤인 1991년 아홉 번 재수 끝에 사법시험에 붙었다).”

김선수 대법관과 친한 사이였군요.

“가장 친한 친구 그룹은 아니었지만 서로 잘 지냈어요. 김선수 대법관은 군대에 끌려갔다가 복학했는데 서울대 본관 도서관 안에 있는 대학신문사 옆 대학원 열람실이라는 조그만 방에서 같이 공부했어요. 나는 책가방만 놔두고 놀러 다녔지만 선수는 치열하게 공부해 수석을 했지요.”

1983년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서울대 법대 졸업 사진ⓒ윤석열 팬클럽 열지대 카페&밴드

학창 시절 윤석열은 돈 맥클린의 《빈센트》 즐겨 부른 낭만파 

서울법대 학창 시절 윤석열은 사시 공부에 전념하던 다른 동료들과 좀 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본인 말대로 잘 놀러 다니고 친구 사귀기를 즐기는 낭만파적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윤석열과 김선수, 양쪽을 잘 아는 그들의 한 해 선배 A씨에 따르면 윤석열은 눈빛이 강렬하고 거리낌없이 큰 몸짓으로 걸어다니곤 했는데 주변에 꼭 친구 두어 명이 함께 있었다고 했다. 정의감과 개성이 강했다고 한다. 운동 중에선 야구를 많이 했고 팔힘과 컨트롤 능력이 좋아 윤석열의 고정 포지션은 투수였다. 1학년 때 교내 야구대회에 출전해 윤석열의 법대팀이 5연속 승리로 우승을 할 정도였다.

술 자리에서 윤석열이 잘 부르던 노래는 “Starry, starry night/ paint your palette blue and grey”로 시작하는 돈 맥클린의 《빈센트》와 같은 가수의 《아메리칸 파이》였다. 《빈센트》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영혼과 예술세계를 맑은 울림으로 표현한 곡이다. 익명을 부탁한 그들의 선배 A씨는 “석열이는 반주 없이 돈 맥클린의 노래를 가사도 보지 않고 멋지게 부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법대생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김선수는 과묵하고 성실한 학구파였다고 한다. 단순히 사시 합격이 목표가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근원을 추구하는 공부가 깊었다는 게 이 선배의 관찰이다. 실제로 김 대법관은 기자에게 “나는 법학과에 입학했지만 학과 동료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고전연구회라는 본부 서클에 들어가 《공자》 《맹자》 《노자》를 읽었다. 고전연구회장을 지내던 1981년 전두환 정권이 주도한 ‘국풍81’ 행사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군대에 끌려갔다”고 회상했다. A씨에 따르면 김선수는 사법연수원 시절 조영래 변호사의 시민합동 법률사무소(중구 서소문 소재)에서 모였던 노동법연구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이 모임에서 만난 사람 중 한 명이 사법연수원 1년 후배인 중앙대 출신의 이재명 경기지사다. 이렇듯 김선수와 이재명의 진보 성향은 20대 중반에 무르익을 대로 익어가고 있었다. 김선수 대법관은 2020년 7월 이재명 경기지사의 선거법 위반 사건 판결 때 과거 그를 변호한 경력이 있어 스스로 제척했다. 그만큼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연합뉴스

“입장이 달라도 친구는 친구, 나는 요새 집에서 팔다리 운동만”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의 전화 인터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김선수 대법관은 사시 합격 과정에서 윤 총장의 역할이 기억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가요. 나와 입장이 다르다고 생각해서일까요. 그래도 친구는 친구지. 철우나 선수나 다 좋은 친구들입니다. 이종찬 의원도 훌륭한 분입니다. 우당의 자손답게(우당·又堂은 이종찬 의원의 할아버지 이회영의 호. 우당 선생은 1910년 조선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자 일족 60여 명의 전 재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나 독립군을 기르는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했다. 1932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사함).”

요새 집 안에만 있는 것 같은데 운동은 어떻게 하십니까.

“집에서 팔다리 운동만 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전 총장의 일거수일투족이 요즘 언론의 추적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윤 전 총장과 이종찬 전 의원, 이철우 교수와의 만남이 화제가 되었습니다만.   

“제가 이종찬 어른을 정치적 멘토로 삼아 그분의 대선 도전과 실패, 정치적 경륜을 배우기 위해 찾아갔다는 식의 보도는 참으로 지나친 추측입니다. 저와 철우는 초등학교 6년 생활 중 4년을 같은 반을 했을 정도로 죽마고우입니다. 54년 지기여서 집안끼리도 한 가족처럼 지냈어요. 어머니끼리 참 친하십니다. 그런 관계에서 제가 오랜만에 가까운 어른을 모시는 마음으로 이종찬 의원 댁을 찾아 뵌 겁니다. 아버님께서도 제게 공직을 마친 만큼 이 의원만은 꼭 찾아가 인사하라고 하셨지요. 그런 자리에서 정치 얘기가 나올 수는 없는 겁니다.”

이철우 연세대 교수ⓒ연합뉴스

이철우 “오른손이 한 일 왼손이 몰라야 하는데 민망”

김선수의 합격 스토리에 등장하는 마지막 당사자는 이철우 연세대 교수다. 이 교수한테도 사실관계를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철우 교수의 답변은 윤석열의 설명과 일치했다. 자신이 석사장교 훈련 때 윤석열에게 전화를 걸어 김선수를 데리고 아버지 이종찬 의원에게 찾아가도록 부탁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철우 교수는 김선수 대법관이 자력으로도 사시 3차를 패스하지 않았을까 하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김선수는 수석합격자이기에 옆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아버님(이종찬 전 의원)이 신원보증을 안 해도 낙방이야 했겠습니까. 우리가 도왔다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얘기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몰라야 하는데 무슨 미담이라도 되는 양 흘러나오니 민망할 뿐이죠. 윤석열은 훈련소에 있던 나를 대신해 자기 일 이상으로 뛰어다녔어요. 선수가 수석합격했다는 발표에 뛸 뜻이 기뻐하더군요.”

이로써 서울법대 79학번의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지금은 60대에 접어든 세 친구의 진술로부터 그들이 20대 청년 시절 나눴던 고뇌와 우정의 스토리를 퍼즐 맞추듯 완성해 나가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하나 미완으로 남은 부분은 김선수 대법관의 기억에 관한 것이다. 3월30일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선수 “두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사실일 것”

윤석열 전 총장의 상세한 묘사와 이철우 교수의 설명을 종합하면 1985년 가을 김 대법관이 윤 전 총장의 안내를 받아 이종찬 의원에게 갔던 건 사실인 것 같다. 기억이 안 나시는지요.

“내가 기억이 정말 안 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면 당연히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선수는 현직 대법관으로서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야권 대권후보 1위로 올라선 친구 윤석열에 대한 감회가 어떠냐는 물음엔 “노 코멘트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취재의 뒤끝은 개운했다. 세 사람이 각자 다른 길을 가고 있어도 마음이 연결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구름 뒤에도 별은 떠 있다. 세월로 두터워진 구름 위에 청춘의 별은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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