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나쁜 말을 이기는 습관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4.05 08:00
  • 호수 164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어나지 않아야 할 범죄의 결과는 참혹했다. 미국 애틀랜타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으로 한국인 네 명을 포함해 여덟 명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사건 발생 직후 현지 경찰은 범인의 ‘섹스 중독’을 언급하며 증오범죄인지 여부를 단정하기 어렵다고 발표했지만, 이 사건이 인종차별·여성혐오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은 거의 없다.

3월2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이 아시아인 혐오 규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지난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 아시아계가 아시아인 증오 규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3월21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이 아시아인 혐오 규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지난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총격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 아시아계가 아시아인 증오 규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아시아인·여성을 겨냥한 범죄의 잔혹함과 더불어 세상을 경악하게 한 일은 또 있었다. 현지 경찰 관계자가 이 사건을 두고 공식 발표를 통해 한 말이 그것이다. 이 관계자는 “(범행이 있었던) 어제는 그에게 ‘나쁜 날’이었다”며 범인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들끓는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당장 “누가 정말 나쁜 날을 보냈는지 아느냐. 희생자들, 그의 가족들, 그들을 다시 볼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나쁜 날이면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말이냐” 같은 비난이 빗발쳤다. 분별없고, 개념 없는 ‘나쁜 말’이 그렇게 세상을 또 한 번 뒤흔들었다. 나쁜 말이 휘두른 칼날은 그만큼 셌다.

말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것을 발설한 자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된다. 누군가를 향해 생각 없이 나오는 말은 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말 중에서 상대를 헐뜯기 위해 하는 말, 사리에 맞지 않는 말, 차별이나 혐오를 담은 말은 필연적으로 논란을 부른다.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다 보면 그런 못된 말, 무리한 말에 대한 절제가 쉽게 무너지곤 한다.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도 없이 ‘갑툭튀’하기도 하고 아예 작정한 채 말해지기도 한다.

이번 서울·부산시장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분별없는 말, 오만과 독선이 가득한 발언, 가시 돋친 표현, 근거 없는 비방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독한 말, 즉 차별과 혐오가 담긴 언어들도 차고 넘친다. “그린벨트 해제는 성별 바꾸기보다 어렵다”는 여당 최고위원의 말이 그렇고, 여당 서울시장 후보를 향해 “도쿄에 아파트 가진 아줌마”라고 한 야권 전 서울시장 후보의 발언이 그렇다. “부산은 3기 암환자 신세”라는 여당 부산시장 후보의 말이나 대통령을 ‘중증 치매환자’에 빗댄 야당 서울시장 후보의 말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이 써도 눈총을 받을 만한 비하의 발언을 공직선거에 나선 사람들이 공공연히 쏟아내고 있다.

다급해진 여야 지도부가 나서 ‘말조심’을 주문하고 있지만, 이 같은 ‘나쁜 말’ 잔치가 쉽게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더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들어 무너뜨리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네거티브 공세의 고삐를 더욱더 당길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나쁜 말이 또 다른 나쁜 말을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가 오히려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역기능의 함정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혐오’ 문제에 오래 천착해 온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에서의 희망은 혐오를 멈추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희망이 ‘현실적인 습관’을 통해 키워진다고 덧붙였다. 상대방에 대한 비난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자신의 철학이나 비전을 알리는 데 주력하는 후보에게 더 많이 귀 기울이는 ‘유권자의 습관’이 필요한 때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