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 절규에도…석달 뭉개다 부랴부랴 나선 軍
  • 이혜영 기자 (zero@sisajournal.com)
  • 승인 2021.06.0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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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가해자, 2일 오후 구속…軍 검경·국방부, 합동수사 방침
‘조직적 은폐·회유’ 정황도 본격 수사…관련자 줄소환 예정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고(故) 이아무개 중사의 주검 앞에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지난 3월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신고한 이 중사는 두달여만인 지난달 22일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연합뉴스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고(故) 이아무개 중사의 주검 앞에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지난 3월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신고한 이 중사는 두달여만인 지난달 22일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연합뉴스

공군 여성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아 온 피해자의 선임 부사관이 결국 구속됐다. 사건 발생 석달이 지나도록 가해자에 대한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군은 여론이 움직이고 나서야 하루 만에 속전속결 신병 확보에 나섰다. 

공군은 사건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탑승했던 차량 내 블랙박스를 통해 성추행 상황을 확인하고도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 중사의 사망을 '단순 변사' 사건으로 국방부에 최초 보고 하는 등 조직적 은폐 정황도 곳곳에서 드러났다. 고인은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전 다른 간부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당하는 등 군의 안이한 대응 속에 성범죄에 지속 노출됐던 정황도 확인됐다.  

군 당국은 이번 사건에 대한 합동수사단을 구성하고, 성추행 가해자는 물론 조직적 은폐·회유에 가담한 군 관계자들을 줄소환해 수사할 방침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장아무개 중사가 6월2일 오후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 압송되고 있다. ⓒ 국방부 제공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장아무개 중사가 6월2일 오후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 압송되고 있다. ⓒ 국방부 제공

석 달만에 고개 숙인 피의자…영장청구 하루 만에 구속 

3일 국방부에 따르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은 전날 오후 10시30분께 공군 20전투비행단 소속 후배 여중사를 성추행 한 혐의(군인 등 강제추행 치상)로 선임 부사관 장아무개 중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장 중사는 서울 용산구 국방부 영내에 있는 근무지원단 미결수용실에 즉각 구속 수감됐다. 장 중사는 영장실질심사에서 주요 혐의를 모두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한 장 중사는 고개를 숙인 채 피해자인 이 중사와 관련한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장 중사의 구속은 서욱 장관이 이번 사건을 국방부 검찰단으로 이관 수사하라는 지시가 나온 직후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군은 장관 지시 이튿날인 2일 장 중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영장실질심사와 영장 발부가 모두 하루 사이에 이뤄졌다.

그러나 이미 사건이 발생한 지 석 달이 지난 데다, 피해자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사망한 뒤에서야 기본적인 조치가 이뤄지면서 군의 안이한 대응을 둘러싼 분노와 질타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고(故) 이아무개 중사의 주검 앞에서 영정을 만지고 있다. 서 장관 오른쪽은 이 중사의 부모. 지난 3월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스스로 신고한 이 중사는 두달여만인 5월22일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이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고(故) 이아무개 중사의 주검 앞에서 영정을 만지고 있다. 서 장관 오른쪽은 이 중사의 부모. 지난 3월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며 스스로 신고한 이 중사는 두달여만인 5월22일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 연합뉴스

'단순 사망' 보고…블랙박스 입수하고도 증거·신병확보 없어 

국방부 등에 따르면, 공군 군사경찰은 이 중사 사망 다음 날인 지난달 23일 국방부 조사본부에 사건을 보고하면서 성추행 범죄 관련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단순 사망'으로 기재했다. 보고 내용엔 사망자 발견 경위, 현장감식 결과, 부검·장례 관계 등 기본적인 개요만 포함됐다. 성폭력 사건 등 특이점이 있을 때는 관련 내용을 함께 보고하도록 돼 있지만, 공군은 이를 모두 생략했다. 

이채익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공군 군사경찰의 초기 조사에서 가해자인 장 중사는 혐의 일부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는 등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 피해자와 주장이 엇갈려 증거인멸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지만 공군은 장 중사를 불구속 상태로 수사한 것은 물론 휴대전화조차 압수하지 않았다. 

장 중사의 휴대전화는 사건이 공군 군검찰로 송치된 이후인 지난달 31일에야 이뤄졌다. 이 중사가 사망한 지 9일이 지나고서야 가해자의 휴대전화가 압수된 것이다. 

군의 대응이 더욱 공분을 사는 것은 공군 군사경찰이 이미 성추행 상황에서 피해자의 음성이 녹음된 블랙박스를 확보한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해당 블랙박스에는 이 중사가 장 중사에게 "하지말아 달라. 앞으로 저를 어떻게 보려고 이러느냐"는 등 성추행 상황을 저지하려던 피해자의 절박한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블랙박스 파일도 피해자가 직접 공군 경찰에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군이 이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는 이 중사에 대한 자체 피해조사가 이뤄지던 시점에도 가해자 대기발령이나 피해자와의 분리 조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장 중사가 타 부대로 파견된 것은 성추행이 발생한 지 2주가 지난 3월17일이었다. 이후 장 중사를 비롯한 군의 조직적 은폐와 회유가 뒤따랐고 피해자는 2차, 3차 가해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이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간 상담만 받고 "자살징후 없다" 결론

이 중사는 성추행 피해 이후 20비행단 소속 민간인 성고충 전문상담관으로부터 22회의 상담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4월15일에는 상담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고, 이후 2주간 6회가량 지역의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 및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달 30일 성폭력상담소는 "자살징후 없었으며, 상태가 호전됐다"는 진단과 함께 상담이 종료됐다.

5월3일 2주 간 청원휴가를 끝낸뒤 코로나19 예방을 위한 자가격리를 한 이 중사는 20비행단에서 15특수임무비행단으로 전속 조치됐다. 복귀 직후 사망 당일로 추정되는 지난달 21일까지 이 중사는 추가로 민간상담 2회를 받았을 뿐, 군 조직에서의 체계적인 지원이나 보호조치는 없었다. 당시에도 이 중사는 상당한 불안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 중사는 복귀 나흘 뒤인 지난달 22일, 전날 혼인신고를 한 남편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이 서욱 국방부 장관(오른쪽 위)과 이동하던 중 오열하며 주저앉고 있다. ⓒ 연합뉴스
6월2일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이 서욱 국방부 장관(오른쪽 위)과 이동하던 중 오열하며 주저앉고 있다. ⓒ 연합뉴스

합동수사단 구성…은폐·회유 가담자들 줄소환 예고 

군 당국은 이번 사건에 대해 군검찰과 군사경찰, 국방부가 참여하는 사실상 합동수사단을 구성해 수사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군 수사 과정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를 위해 민간검찰과 유사하게 민간인이 참여하는 '군검찰 수사심의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할 계획이다. 군검찰 차원에서 수사심의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사단은 성추행이 발생한 1차 범죄 상황부터 사건 이후 이 중사에 대한 군 관계자들의 회유와 협박 등도 집중 조사할 계획이다. 20비행단 소속 상관들의 회유와 사건 은폐 시도 여부, 20비행단 군사경찰의 초동 부실수사 의혹 등도 규명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중사의 가족에 따르면, 성추행 피해 사실을 인지한 후 상관들은 오히려 "없던 일로 해주면 안 되겠느냐", "살면서 한번 겪을 수 있는 일"이라며 회유를 시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해자인 장 중사도 피해자를 향해 "꺼져"라는 막말을 하거나 주변인을 통해 압박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유족 측은 이 중사가 지난해에도 부대 회식 자리에서 다른 간부에 의해 성추행 피해를 당해 직속상관에게 알렸지만, 무마된 부분에 대해서도 수사해달라는 내용의 추가 고소장도 제출할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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