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머리 휘날리며, 더 높은 곳 향하는 이재성의 꿈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6.06 12:00
  • 호수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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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부 리그 최고의 선수에 올라…분데스리가 1부 리그와 프리미어리그 이적 유력

축구 국가대표팀 미드필더 이재성은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유지하고 있다. 헤어밴드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묶어야 경기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웬만한 여성보다 길다. K리그 전북 현대에서 뛸 당시만 해도 이재성은 프로 생활 내내 짧고 단정한 머리를 유지했지만, 지난 2018년 여름 독일 프로축구 2부 리그(2.분데스리가)의 홀슈타인 킬로 이적한 뒤부터 머리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3년간 이재성이 뛴 홀슈타인 킬의 연고지인 킬은 북해와 발트해 사이의 유틀란트반도에 위치한 작은 항구도시다. 인구 25만 명이 채 안 되는 이 도시는 독일의 한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프랑크푸르트·쾰른·베를린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다. 인근 대도시인 함부르크로 나가야 한국인 커뮤니티와 접촉할 수 있을 정도다. 

킬에 합류한 뒤 이재성은 익숙했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축구에만 집중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외출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됐고, 미용실 방문도 어려워 그때부터는 아예 작정하고 수도사처럼 머리를 길렀다. 그의 풍성한 장발은 지난 3년간 그가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하며 유럽에서의 성공을 위해 노력했는지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5월29일(현지시간) 홀슈타인 킬의 이재성이 독일 분데스리가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대1 동점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EPA연합
5월29일(현지시간) 홀슈타인 킬의 이재성이 독일 분데스리가 승강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대1 동점골을 터뜨린 뒤 환호하고 있다.ⓒEPA연합

에이스 이재성 맹활약에도, 팀은 1부 리그 승격 직전에서 분루

2014년 K리그에 데뷔한 이재성은 ‘신인들의 무덤’으로 통하는 ‘1강’ 전북에서 곧바로 주전 자리를 점했다. 5년 동안 팀에 4차례의 K리그 우승을 안겼고, 2016년엔 AFC 챔피언스리그 제패에도 성공하며 아시아를 정복했다. 2017년에는 리그 MVP까지 차지했다. 국내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진 그는 유럽 진출을 타진했고, 러시아월드컵 후 홀슈타인 킬과 3년 계약을 맺으며 독일로 향했다. 

지난 3년 동안 이재성은 스포트라이트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킬과 계약을 맺자 우려 섞인 시선도 나타났다. 만 26세의 나이에 연봉까지 스스로 낮추며 2부 리그에서 시작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하지만 이재성은 “경력이든 트로피든 쌓인 것은 과거다. 꿈이 없다면 성장도 지체된다. 더 이상 유럽 진출을 미룰 수 없었다. 킬은 단장부터 감독까지 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원하는 팀이었다. 차곡차곡 내 꿈을 키워가고 싶다”며 미련 없이 독일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재성이 2부 리그에서 소속팀의 승격을 위해 애쓰는 사이 동갑내기인 손흥민(토트넘)은 유럽 최고의 선수로 활약했다. 1년 늦게 유럽에 입성한 황의조(보르도)도 프랑스 무대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워갔다. 비교되는 부분은 있었지만, 이재성은 한눈팔지 않았다. 2020년 여름 독일 1부 리그 팀의 관심이 있었지만, 3년 계약의 마지막 해에 한 번 더 승격을 위해 노력해 달라는 킬 구단의 호소에 결국 잔류했다. 

홀슈타인 킬에서 뛰는 3시즌 동안 이재성은 리그 93경기에서 19골 17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가 됐다. 올 시즌은 리그 33경기에서 5골 4도움을 기록했고, 팀 내에서 두 번째로 많은 4차례의 경기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FA컵인 DFB포칼에서는 독일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꺾는 등 돌풍을 일으키며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이재성과 킬은 해피엔딩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시즌 내내 치열한 선두권 경쟁을 한 킬은 막판 리그 2경기에서 모두 2대3 역전패를 당하며 1부 리그 승격 직행권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 2경기 중 1경기만 승리했어도 킬은 리그 2위를 기록해 다이렉트로 승격할 수 있었지만 결국 3위로 마무리해 1부 리그에서 16위를 기록한 쾰른과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원정으로 치러진 승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킬은 이재성의 어시스트를 마무리한 지몬 로렌츠의 결승골로 1대0 승리를 거뒀다. 홈에서 무승부만 거둬도 팀의 사상 첫 1부 리그 승격이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흘 후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킬은 전반 이재성이 동점골을 터뜨리는 등 분투했지만, 후반 수비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1대5로 거짓말 같은 패배를 허용했다.  

승강 플레이오프는 이재성과 킬의 마지막 동행이었다. 2018년 맺은 3년 계약이 종료된 이재성은 킬의 승격 여부와 관계없이 이적이 예고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팀으로부터 관심을 받은 이재성은 킬을 떠나는 상황에서도 3년간 몸담은 팀의 꿈을 위해 끝까지 노력한 것이다. 그런 그가 승강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자신의 SNS에 독일어로 “나는 당신들이 자랑스럽다. 홀슈타인 킬을 사랑했다”는 작별의 글을 올리자 많은 동료와 팬들은 “전설(Legende)”이라며 그의 앞날을 축복했다.

 

獨 프라이부르크·호펜하임, 英 팰리스 등에서 큰 관심 

월드컵 2차 예선을 소화하기 위해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에 합류한 이재성은 “지난 3년은 유럽에서의 꿈을 이뤄가는 첫 단계였다. 유럽 무대에 저를 알린 기회가 됐고, 많은 성장을 했다”고 킬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이어서 “승격은 하지 못했지만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많은 시즌이었다. 유럽 진출 후 2~3년 차에는 한국에서 잘하던 플레이를 독일에서도 보여줄 수 있었다”며 다음 도전에 대한 자신감도 내비쳤다. 

이재성이 대표팀의 2차 예선 일정에 집중하는 사이 그의 이적 작업은 빠르게 진행되는 모습이다. 그의 에이전트인 친형 이재혁 SJ스포츠 대표는 유럽 현지 파트너인 영국 에이전시 유니크스포츠매니지먼트(USM)와 함께 바쁘게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지난해 여름부터 독일 분데스리가, 그리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다수의 팀이 이재성을 관찰해 왔다. 2년 연속 킬에서 기복 없는 에이스 역할을 한 이재성은 기량 외에 인성, 적응력 등에서도 호평 일색이다. 

독일 현지 언론들은 이재성의 다음 행선지를 예고했다. 독일에서는 TSG 호펜하임, SC 프라이부르크, 함부르크 SV, 베르더 브레멘 등이, 영국에서는 크리스털 팰리스가 관심을 보이는 중이라고 독일의 ‘TAG24’가 보도했다. 이 중 가장 앞서 있는 팀은 호펜하임과 프라이부르크로 알려졌다.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독일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고 팬도 많지만, 다음 시즌 2부 리그에서 출발한다. 유럽 1부 리그로 향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이재성의 뜻과는 맞지 않다. 

프라이부르크와 호펜하임은 지난 시즌 10위와 11위를 차지하며 안정적으로 1부 리그에 잔류한 팀이다. 두 팀 모두 한국인 선수가 뛰고 있거나, 과거 뛰었던 독일 내 친한(親韓) 구단들이다. 차두리(현 오산고 감독)가 풀백으로 본격 변신하는 발판을 마련한 팀으로 유명한 프라이부르크에는 현재 올림픽 대표인 정우영이 속해 있고, 최근 군 문제를 위해 K리그 수원 삼성으로 복귀한 권창훈이 뛰었다. 호펜하임은 김진수(현 알나스르), 박인혁(현 대전 하나시티즌)이 과거에 몸 담았다. 

좀 더 큰 무대로 향하는 것도 고려 중이다. 손흥민이 활약 중인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된 크리스털 팰리스가 그 대상이다. 과거 이청용이 뛰었던 팰리스는 중하위권 팀이지만 8시즌 연속 1부 리그에 잔류했을 만큼 경쟁력 있는 팀이다.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이재성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세계적인 대도시이자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런던을 연고지로 하고 있어 생활 면에서도 많은 이점이 있다. 이재성은 “6월 안에는 결정이 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분데스리가와 프리미어리그를 선호한다”며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꿈을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고 향한 그의 도전이 3년 만에 현실로 영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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