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경멸당할 것보다 찬양받을 것이 더 많다”
  • 박철화 문학평론가 (chunyg@sisajournal.com)
  • 승인 2021.07.26 11:00
  • 호수 165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병 속의 문학, 문학 속의 역병…카뮈의 《페스트》

폭염이다. 파란 하늘에서 불볕더위가 쏟아진다. 실제 열기도 그렇지만 올해 여름이 더 뜨거운 가혹함으로 다가오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알파에서 델타를 거쳐 감마에 이르기까지 변이를 거듭하며 바이러스는 우리의 생명과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얼떨결에 갇혀 지낸 지난해 여름은 그렇다 치자. 이번 여름은 마스크 없이 산과 바다를 만끽하며 누릴 줄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백신 접종도 시작됐으니 희망은 손에 움켜쥘 정도로 가까이 와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감염자는 다시 늘어나 연일 불길하게 기록을 갈아치우며 백신 접종자조차 돌파 감염이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과연 인류는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며칠 전, 대학 동문 단톡방에 질문이 하나 올라왔다. 고3 입시생 자녀가 P사의 백신 접종을 앞두고 있는데,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심근염과 심낭염 부작용 우려를 새롭게 제기하고 있으니 과연 맞는 게 옳으냐는 내용이었다.

누가 알겠는가? 백신 부작용 발생률이 교통사고 비율보다 낮다지만 사랑하는 아이의 미래가 걸려 있는 문제에서 부모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처한 불확실성의 암울한 상황이기도 하다. 정답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뭔가를 선택해야 한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막연히 해결되리라는 희망에만 머무르는 일은 결국 모두의 패배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AP 연합
ⓒ AP 연합

페스트가 점령한 바닷가 도시 오랑

이럴 때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그것이다. 알제리의 바닷가 도시 오랑을 무대로 갑자기 페스트가 발생하고 도시가 폐쇄됐다가 마침내 페스트가 사라지고 풀려나는 이 연대기는 우리가 처한 지금 상황을 놀랍도록 유사하게 비춰준다. 페스트가 점령한 도시에서 누군가 죽고, 누군가는 도망치려 하며, 또 누군가는 그 상황 자체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담고 있는 이 묵시록적 소설이 코로나바이러스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익숙한 모든 삶에서 떠나 갇히고 도망치고 싸우며 드물게 죽기도 한 우리 자신의 경험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작가는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는 다양한 인간 유형을 배치하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먼저 페스트가 우리의 오만함에 대한 징벌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적 관점의 파늘루 신부가 있다.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시민들에게 그는 신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강론을 한다. 그러고는 발병 현장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다 그 자신 환자가 돼 죽는다. 생존의 위협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이 좀 더 강력한 초월적인 존재에 기대고자 하는 일은 종교적 인간으로서의 본성이다. 죽음의 순간까지 십자가를 손에서 놓지 않은 파늘루는 그런 점에서 종교적 구원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페스트균이라는 과학적 진실을 가릴 위험이 있다.

그 반면 이 세계와 인간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당장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돕는 행위 자체가 생의 의미라는 타루가 있다. 세계에 대한 아무런 희망 없이도 먼저 나서서 보건위생대를 조직해 최선을 다하는 그는 ‘신 없는 시대의 헌신적 성자(聖者)’라 할 수 있다. 도시가 페스트에서 해방되는 마지막 순간, 그 페스트로 생을 마감하는 타루는 역설적으로 종교적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들 한편에는 페스트라는 극한적 폐쇄 상황 자체가 범죄자로서의 자신에 대한 사회의 단죄를 늦추는 현실을 즐기는 코타르 같은 존재도 있다. 인간 사회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곳이다. 타인에게는 해방의 행복한 순간이 코타르에겐 다시 감옥의 시간이 되기에 마지막 순간 그는 미쳐버린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극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인간들

코타르와 달리 오랑에 갇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떻게든 도시를 벗어나려 한 랑베르도 있다. 도시의 그들과는 ‘다른 나’를 상징하는 랑베르는 불법적 수단을 써서라도 파리의 사랑하는 여인 곁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마지막 탈출 기회가 열리는 순간, 그는 ‘나와 그들’의 구분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우리’라는 연대와 공감을 선택한다.

작품 초반 페스트 발생 이전 자살하려 목을 맨 코타르를 살린 그랑은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시청의 계약직 하급 공무원인 그랑은 현실적으로는 주목받을 구석이 전혀 없다. 하지만 프랑스어로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 말해 주듯 그는 드러나지 않게 사회를 지탱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한다. 그런 평범하지만 굳은 사람들이 있기에 이 사회가 굴러간다.

그들 모두의 곁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이 연대기를 완성하는 인물이 베르나르 리외다. 종교적 구원에도 사회적 대의에도 관심이 없지만 그는 의사로서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환자를 돌보는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수행한다. 그 와중에 파늘루 신부가 죽고, 멀리 요양을 떠난 아내도 죽으며, 생을 다투는 현장에서 친구가 된 타루의 죽음도 겪지만 그는 동요를 누르면서 페스트균이라는 현실과 용기 있게 얼굴을 마주한다.

그는 적는다.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증언을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최소한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의 기억을 남겨 재앙의 한복판에서 배우는 일,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큼은 말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재앙처럼 주어진 바이러스 사태 이후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바이러스를 옮긴 매개체가 인간 자신이다. 그러면 인간을 불신하고 주변에 담을 쌓아야 하나? 그럴 수는 없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감염환자를 돌본 영웅들이 있듯이 우리는 무엇보다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해 방역 위생지침을 지키며 두려움을 떨치고 백신 접종을 받아야 한다. 그게 어느 날 주어진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반항이며,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바이러스가 모습을 바꿔 또 찾아오는 상황이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