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극의 새로운 길 통했나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9.13 15:00
  • 호수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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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구마사》 사태 그 후…《홍천기》 등 접근 방식 달라져

단 2회 만에 폐지가 결정되며 사라져버린 《조선구마사》 사태 이후, 사극들은 조심스러워졌다.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어느 선까지 다루느냐 등 그 사극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 것. SBS 월화 드라마 《홍천기》가 시대와 인물을 모두 가상으로 세운 건 그래서다. 

아마도 SBS 월화 드라마 《홍천기》는 그 첫걸음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남달랐을 게다. 그건 지난 3월 단 2회 방영되고 폐지가 결정된 《조선구마사》 사태 때문이다. 역사 왜곡 논란과 더불어, 중국풍 소품들이 등장하며 중국의 문화공정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오면서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던 사극이었다. 사실 사극의 역사 왜곡 논란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조선구마사》처럼 단기간에 폐지까지 이른 건 충격적인 결과였다. 시청자들이 광고주 불매운동까지 벌이게 되면서 생겨난 결과다. 결국 드라마 제작자들, 특히 사극 제작자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사극에서 역사에 더해지는 상상력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되는가에 대한 심각한 장벽을 마주하게 됐다. 

그래서 《홍천기》는 정은궐 작가가 쓴 원작소설과 달리 그 시대적 배경으로 조선 대신 가상국가인 ‘단왕조’를 설정했고, 등장인물이나 지명 등도 모두 가상으로 바꿨다. 애초 역사 왜곡 논란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홍천기》는 첫 시작부터 마왕이 그림 속에 봉인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 드라마가 역사와는 무관한 ‘판타지 사극’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SBS 제공
ⓒSBS 제공

어떤 정체성 갖는지 분명히 해야 

《조선구마사》 역시 구마사제가 등장해 악령이 깃든 이들과 싸우는 판타지 사극이었다. 하지만 그 시대적 배경을 조선으로 했고 역사 속 실존인물인 태종, 세종 등이 등장함으로써 논란이 야기됐다. 다양한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제작자들은 곤혹스러워졌지만, 결국 최종 소비자라 할 수 있는 대중의 정서가 아직까지 역사적 인물들을 자의적으로(특히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데 불편함을 넘어 분노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홍천기》의 선택은 그래서 이런 정서들을 감안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판타지 사극 《홍천기》가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는 판타지를 다루고 있다는 걸 전면에 내세우면서, 시대적 배경, 인물까지 가상으로 세운 선택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즉 진짜 역사가 중요하지 않은 사극이 굳이 실제 역사와 인물을 내세워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 소지 자체를 지워냄으로써 온전히 이 사극이 그려내는 멜로와 판타지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즉 《조선구마사》 사태를 두고 과연 사극이 더는 역사 이외의 상상력을 더할 수 없게 된 것 아니냐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사극이 실제 역사가 아닌 허구가 더해진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고, 나아가 상상력의 투입에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극이 엄밀한 역사를 다루는 정통사극인지, 아니면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지만 상상력이 더해짐으로써 실제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게 하거나 혹은 역사가 채워주지 않은 공백을 허구로 채워주는 퓨전사극인지, 나아가 아예 배경만 과거일 뿐 실제 역사와는 상관없이 멜로나 액션 같은 장르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르사극인지에 따라 표현 방식에 차이를 둬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떤 사극이든 역사에 빚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실제 역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시공간 역시 하나의 역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극이 역사에 책임의식을 갖는 건 당연하고, 그래서 그것을 표현할 때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당대의 대중이 갖는 정서나 생각들에 비춰 불편함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지 자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꺼내 와 과하게 표현하거나, 시대적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고증도 안 된 소품들로 불필요한 논쟁의 소지를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사극 제작자들은 그래서 만들고 있는 사극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 맞는 표현들을 선택할 수 있다.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의 한 장면ⓒSBS 제공

사극에 어울리는 플랫폼 성격도 중요해져 

또한 중요해진 게 사극과 그 사극에 얹어지는 플랫폼과의 매칭이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중이 생각하는 플랫폼에 허용되는 콘텐츠들의 표현 수위는 아직까지는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이 다르고 또 OTT가 다르다. OTT가 가장 높은 수위까지를 보여줘도 큰 불편함을 주지 않는 플랫폼이라면, 지상파는 아직 어느 적정한 정도의 표현 수위가 요구되는 플랫폼이다. 

물론 매체 환경의 변화는 현재 지상파들에까지 19금 콘텐츠가 등장할 정도로 변모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상파는 여전히 ‘보편적 시청자들’이 보는 플랫폼으로서 대중들은 과도한 표현 수위에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즉 예를 들어 《조선구마사》가 SBS가 아니라 넷플릭스에서 방영됐다면 그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을까. 어째서 《킹덤》은 되고 《조선구마사》는 안 되느냐는 이야기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활용했는가 아닌가를 떠나 플랫폼에 대중이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표현 수위가 있어 생겨난 다른 결과다. 

심지어 지상파들 속에서도 특정 사극의 형태가 더 잘 어울리는 플랫폼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정통사극은 공영방송인 KBS에 훨씬 잘 어울린다. 대하사극 같은 경우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건 과도한 상상력보다는 역사를 좀 더 제대로 알려주는 정통사극이다.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적절히 결합해 만들어지는 퓨전사극은 이병훈 감독이 그간 해왔던 전통에 의해 MBC에 더 잘 어울린다. 마찬가지로 《홍천기》 같은 장르적 색채가 강한 사극은 상업방송인 SBS에 더 어울리는 면이 있다. 물론 이건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지만, 대중이 그간 지상파 방송사들이 해온 색깔과 만들어온 사극들의 전통 속에서 정서적으로 느끼는 부분이다. 

ⓒSBS 제공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MBC 제공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홍천기》, 11월 MBC에서 방영 예정인 《옷소매 붉은 끝동》, 12월 KBS에서 방영될 《태종 이방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 사극들이 그 방송사의 색깔과 잘 어울리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상업방송 SBS의 판타지 사극, MBC의 퓨전사극 그리고 KBS의 정통사극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조선구마사》 사태는 사극이 새로운 길을 걷게 만들었다. 이제 사극 제작자들은 그 사극의 정체성을 먼저 파악하고 거기에 맞는 표현 수위와 방법을 고민해야 하며, 나아가 그 사극에 어울리는 플랫폼도 선택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선택들이 이제는 사극의 성패를 가르는 또 하나의 요건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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