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지금 사모펀드와 전쟁 중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1.09.22 10:00
  • 호수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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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오너와 ‘머니게임’ 벌이는 사모펀드, 최후의 승자는?  

재계가 최근 사모펀드와의 소송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오너의 변심으로 사모펀드와 체결한 인수·합병 ‘딜(Deal)’이 한순간에 엎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주주 간 계약 조항을 둘러싼 이견이 확대되면서 법정 다툼도 잇따르고 있다. 투자업계에서는 “재벌가 혹은 대기업이라는 타이틀은 암묵적으로 ‘믿고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최근 계속된 소송으로 이런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지적한다.

구성된 어피니티컨소시엄과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의 ‘풋옵션’(지분을 일정 가격에 되팔 권리) 공방이 대표적이다. 국제상사중재위원회(ICC) 중재판정부는 지난 9월6일 신 회장이 재무적 투자자(FI)로 참여한 어피니티컨소시엄의 교보생명 지분을 40만9000원에 풋옵션 매수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풋옵션 계약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도 매수 의무를 강제하지 않은 사실상 ‘반쪽짜리’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때문에 양측의 추가 소송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시사저널 박정훈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연합뉴스

입맛 따라 ‘판’ 깨는 대기업 오너들

신 회장과 어피니티컨소시엄의 갈등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9월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IMM PE·베어링PE·싱가포르투자청 등이 참여한 어피니티컨소시엄은 대우인터내셔널 등이 보유한 교보생명 지분 24.01%를 약 1조2000억원에 인수했다. 2015년 9월까지 교보생명의 IPO(기업공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신 회장에게 주식을 되팔 수 있는 풋옵션 조항이 인수 조건에 포함돼 있었다. 교보생명의 IPO는 수차례 미뤄졌고, 어피니티컨소시엄은 2018년 10월 신 회장을 상대로 풋옵션을 행사했다.

하지만 신 회장은 어피니티컨소시엄의 풋옵션 행사를 거절했다. 문제는 가격에 있었다. 신 회장 측은 풋옵션 행사 가격인 40만9912원이 지나치게 높다고 봤다. 교보생명의 주식이 지나치게 고평가됐다는 것이다. 양측의 갈등은 소송전으로 번졌고, 해당 사안은 ICC 중재판정부의 판단에 맡겨졌다.

이번 중재판정부 판단에 대해 양측은 서로가 ‘승자’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교보생명은 “중재판정부는 어피니티컨소시엄이 제출한 40만9000원이라는 가격에 신 회장이 풋옵션을 매수하거나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고 강조했다. 반면 어피니티컨소시엄은 “중재판정부는 신 회장에게 어피니티의 중재 비용 전부 및 변호사 비용 50%를 부담하라고 명했다. 신 회장은 본인 비용 전부를 부담하면서 책임 있는 당사자임을 인정했다”고 반박했다.

여전히 양쪽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추가 소송이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한다. 어피니티컨소시엄은 풋옵션이 유효한 만큼 계약이행청구소송 등을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법적 분쟁이 시작된다면, 신 회장은 길게는 3년 이상을 또다시 송사에 시달려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도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남양유업은 지난 5월 자사 유제품 불가리스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 효과를 과장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남양유업에 대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지자 홍 회장은 결국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회장직 사퇴와 함께 경영권 포기를 선언했다. 실제로 남양유업은 5월12일 오너 일가의 경영권을 포함한 지분(53.08%)을 한앤컴퍼니에 3107억원에 매각하는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 홍 회장은 한앤컴퍼니로부터 310억원의 계약금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상황이 급변했다. 홍 회장은 지난 9월1일 남양유업 매각을 위해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한 사모펀드 한앤컴퍼니에 매각 철회를 통보했다. 한앤컴퍼니는 홍 회장을 상대로 주식매매계약 의무를 촉구하는 거래종결이행소송을 제기했다.

남양유업 매각 철회는 사실상 홍 회장의 변심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분 매각 발표 후 남양유업 주가는 36만원(5월12일)에서 81만3000원(7월1일)까지 폭등했다. 홍 회장 입장에서는 ‘너무 싸게 팔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홍 회장은 지분 매매 가격에 상당한 불만을 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7월30일 예정돼 있던 임시 주주총회를 9월14일로 연기하며, 거래 종결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매각 의사를 철회한 것이다.

양측은 현재 매각 결렬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홍 회장은 한앤컴퍼니를 향해 ‘부도덕한 사모펀드’라고 비판했다. 한앤컴퍼니는 홍 회장에 대해 ‘계약과 약속을 경시한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한앤컴퍼니는 거래종결소송에 착수한 데 이어, 홍 회장 일가를 상대로 전자등록주식처분금지 가처분 신청도 했다. 법원이 가처분 결정을 인용하면서 한앤컴퍼니의 손을 들어준 상황이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대기업 오너들의 행태에 혀를 내둘렀다. 교보생명·남양유업과 사모펀드 간 분쟁은 모두 오너들이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데서 시작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IB업계 관계자는 “아무리 자본시장이 돈의 논리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약속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기업 입장에서는 계약의 불공정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번 사태의 본질은 대기업 오너들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계약을 뒤집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자본시장 상도덕은 어디로

이 때문에 IB업계에서는 계약 등을 체결할 때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각종 방어 조건을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사모펀드들의 소수 지분 투자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 엑시트 전략을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투자금 보호에 대한 조항과 증거를 상세히 남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교보생명과 남양유업 측은 현재 오너들의 계약 불이행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중재판정부에서 어피니티컨소시엄의 풋옵션 가격을 인정하지 않은 만큼, 추후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이라고만 짧게 설명했다. 남양유업 관계자 역시 “현재 상황에 대해 기존 언론보도 외에는 밝힐 만한 입장이 없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몇 년간 사모펀드와 분쟁이 있었던 두산과 대한항공은 종전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 두산그룹은 7년간 법정 다툼을 한 끝에 사모펀드 IMM프라이빗에쿼티를 포함한 FI 컨소시엄이 제기한 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DICC) 투자원금과 이자 15% 지급 소송에서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으면서 마무리됐다. 아울러 2019~20년 말까지 사모펀드 KCGI가 주도했던 대한항공 경영권 분쟁도 올해 초 3자 연합(KCGI·조현아 전 부사장·반도건설)이 해체되면서 사실상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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