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공급 ‘발등의 불’에 고집 꺾은 정부
  • 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gil@sisajournal-e.com)
  • 승인 2021.09.30 10:00
  • 호수 1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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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가 상한제 등 ‘공급 걸림돌’ 지적 수용…민간 참여 독려 위해 이달 중 개편안 공개

‘금리 인상’과 ‘고점 경고’에도 집값 상승이 멈추지 않자 정부가 분양가 통제 완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집값 안정화 명분으로 고수해 왔던 ‘분양가 상한제’와 ‘고분양가 심사제’를 개선하기로 한 것이다. 두 제도가 민간 주택 공급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건설업계의 지적을 정부가 사실상 수용한 것으로 부동산 시장은 보고 있다.

특히 이번 결정은 속도감 있는 주택 공급을 위해 건설업계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한 제스처로 풀이된다. 정부는 공공 주도 공급계획의 한계에 따라 사전청약을 민간주택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공공에 비해 사업 속도가 빠른 민간 공급 시그널을 통해 공급 부족 우려를 불식시키겠다는 복안이 깔려 있다. 분양가 문제로 멈춰 있었던 재건축·재개발 사업에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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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 인상에도 집값 상승이 멈추지 않자 정부가 최근 분양가 완화 카드를 꺼내들었다. 사진은 서울 반포동 원베 일리 공사 현장ⓒ연합뉴스

분양가 규제로 서울 분양 물량 ‘뚝’

실제로 국토교통부는 현재 ‘분양가 상한제’와 ‘고분양가 심사제도’에 대한 개선 방안을 검토 중이다. 민간과 업계의 다양한 의견을 추가로 수렴해 이르면 9월 내에 개편안을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노형욱 국토부 장관은 지난 9월9일 열린 2차 주택공급기관 간담회에서 “고분양가 심사제, 분양가 상한제, 주택사업 인허가 체계 등에 대한 민간 업계의 애로사항을 짚어보고 개선이 필요한지 여부를 면밀히 살펴보겠다”며 “보증기관의 리스크 관리, 과도한 분양가 책정으로 인한 시장불안 차단, 쾌적한 주거환경 관리 등 제도 본연의 취지는 지켜져야 하겠으나, 안정적이고 신속한 주택 공급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합리적인 개선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노 장관의 발언 이후 정부는 한 번 더 분양가 규제 완화 의지를 드러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9월15일 열린 부동산 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에서 주택 공급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분양가 상한제를 비롯한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고 했다. 홍 부총리는 이날 모두발언에서 “이미 발표된 주택 공급 물량의 조기 공급이나 이에 더한 추가 공급 역량 확보 등을 위해 민간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며 “아파트 공급 속도를 높이기 위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분양가 심사를 위한 고분양가 관리제 및 분양가 상한제상 불합리했던 부분을 개선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결정은 민간 주택 공급 확대와 함께 사전청약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인다. 정부는 오는 11월부터 사전청약 대상을 공공택지 내 민간 주택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민간 사전청약은 본청약까지 소요기간이 공공보다 짧아 시장에 미치는 효과가 크다. 민간 보유 공공택지는 이미 대지 조성이 완료돼 사전청약 후 본청약까지 기간이 짧기 때문이다. 아울러 브랜드 아파트 시세의 80% 미만이라는 가격 메리트까지 있어 시장 안정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부가 민간에 손을 내민 이유는 2·4대책 등 공공 주도 물량이 시장에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노 장관은 간담회에서 “여러 대책으로 200만 호 이상의 중장기 공급 계획을 발표했지만 입주까지는 수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5~6년, 보통 10년이 훌쩍 넘는다”고 말했다. 집값 안정화를 위해 충분한 공급 시그널을 줘야 하는 정부 입장에선 민간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인 셈이다.

분양가 상한제는 신규 분양 아파트의 가격 안정화를 위해 주택 분양 시 택지비(감정가)와 건축비에 건설사의 적정 이윤을 보탠 분양가를 산정한 뒤 그 가격 이하로 분양하게 한 제도다. 분양가는 주변 시세의 80% 이내에서 산정된다.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기존 공공분양 주택에 이어 지난해 7월부터 민간분양 주택에 확대 시행되고 있다.

시장에선 분양가 상한제가 분양 가격이 지나치게 오르는 걸 억제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공급을 가로막는 규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분양가 책정의 기준이 되는 택지비가 감정가의 기준인 데다 고급 마감재 등의 비용을 분양가에 제대로 반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지자체마다 분양가 인정 항목, 심사 방식 등 기준이 달라 지역별로 분양가가 들쑥날쑥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분양가 규제 여파로 서울 지역 내 새 아파트 공급은 크게 위축됐다. 사업성을 우려한 조합들이 분양 일정을 미루면서다.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올해 서울에서 분양이 예정했던 4만2400가구 가운데 아직 시기를 못 정한 물량은 2만2900가구다. 분양가 상한제에 발목이 잡혀 사업이 중단된 재건축·재개발 사업지도 서울에서만 55곳(7만여 채)에 달한다. 공급 부족에 대한 우려감은 매수심리를 자극해 집값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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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0일 서울 경실련에서 열린 ‘정권별 법정 건축비와 민간 건축비 변동 분석 결과 발표’ 모습ⓒ연합뉴스

“정비사업에도 숨통 트일 듯”

HUG가 시행하는 고분양가 심사제 역시 공급의 걸림돌로 꼽힌다. 고분양가 심사제는 분양가 상한제 적용 지역을 제외한 조정대상지역 등에서 분양하는 아파트들이 분양보증을 받기 위해 거쳐야 하는 절차다. 건설업계는 올해 2월 개선된 심사 기준에 문제를 제기한다. 해당 기준에 따르면 새 아파트 분양가는 인근 500m 이내에 있는 ‘준공 20년 미만 아파트’를 비교 단지로 정해 책정한다. 신규 아파트 분양가를 20년짜리 아파트 시세를 기준으로 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공급의 걸림돌로 꼽히던 분양가 규제가 완화되면 지지부진했던 재개발·재건축 사업도 속도를 낼 것으로 봤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규제 완화로 막혀 있는 민간 공급의 활로를 열어주고 민간의 사전청약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며 “민간 주택시장과 정비사업을 통한 주택 공급이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최근 정부의 규제 완화 발언에 대해 적극적인 협력 의사를 밝히며 정비업계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오 시장은 “당장 강동구 둔촌주공의 1만2000여 가구 공급이 막혀 있고, 서울에 분양가 상한제로 공급이 막혀 있는 가구 수만 6만여 가구에 달한다”며 “앞으로 서울시는 공급을 오히려 위축시키는 분양가 상한제 관련 심사 기준이나 관리 제도 등과 관련해 비합리적인 부분은 국토부에 적극 건의하고 협의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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