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 깬 정용진, ‘재벌 오너와 정치’ 관계 재편할까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1.28 10:00
  • 호수 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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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집중포화 맞고 움츠러들었던 오너들과 달리 새로운 담론 제공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을 둘러싼 ‘멸공’(공산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를 멸함) 논란이 잦아들었지만, 후폭풍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2000년대 이후 재벌가에서 처음 외부로 표출된 정치 발언 내지 정치 개입으로 인해 그간 가라앉아 있던 수많은 담론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기업인과 정치의 역학관계를 놓고 갑론을박이 터져 나온다.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한 결과, 현재 재계 안팎에선 정 부회장의 정치 발언 이슈가 앞으로 신세계 사업과 주주 가치 등에 미칠 영향을 예의주시하는 중이다. ‘멸공’ 논란이 처음 불거진 2021년 11월15일과 일단락된 올해 1월18일을 기준으로 볼 때 신세계, 이마트,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 I&C, 광주신세계 등 신세계그룹 관련주 주가는 모두 내려갔다. 그러나 낙폭이 제한적이고 코로나19 확산, 이커머스 시장 경쟁 심화 등 다른 하방 요인도 있는 만큼 순전히 정 부회장 때문에 주가가 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게 증권가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장기적인 영향이다. 김정환 GB투자자문 대표는 “기업인, 특히 기업 내 영향력이 절대적인 재벌 오너가 정치색을 완연히 드러냈을 때 발생 가능한 여러 부작용이 이번 정 부회장 사태로 처음 현실화했다”면서 “이마트 노동조합의 비판 성명에 대한 정 부회장의 사과로 신세계 내부 갈등만 어느 정도 봉합됐지, 시장은 ‘언제든 다시 비슷한 논란이 불거지겠구나’라고 예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유통기업의 경우 가뜩이나 소상공인 보호, 대선 동향 등 현안에 민감한데, 리더가 입방아에 오르는 현 상황은 자칫 나중에 경영의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2020년 1월21일 고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 빈소에 들어서고 있다.ⓒ연합뉴스

‘정치 설화’ 후폭풍 우려에도 당당한 정용진 

이미 더불어민주당 일각에서 정 부회장을 콕 집어 비판하고 이마트, 신세계백화점, 스타벅스 등 신세계 계열사를 보이콧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바 있다. 또 1월1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주최로 열린 한국경영자총협회 간담회에서 신세계가 제외되자 ‘괘씸죄’ 때문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 부회장 이슈와 관련 없다’는 경총 측 해명에도 무수한 뒷말이 나왔다. 

정 부회장은 1월13일 ‘저의 자유로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전적으로 제 부족함입니다’라며 몸을 낮춘 뒤에도 활발히 SNS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1월18일 ‘멸공’ 대신 ‘필승’ 해시태그를 달며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의 저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사진을 게재했다. 책 가운데 ‘스스로 난쟁이가 되고자 한 조선의 지배계층’ ‘이순신 장군이 위대한 진짜 이유’ ‘17세기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 만주족 편에 섰더라면?’ 등의 챕터와 ‘역사가 당신을 전략적으로 만들고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강한 당신이 성공을 부르고 강한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문장은 따로 소개했다. 정 부회장의 이런 행보는 강도만 완화됐을 뿐 기존 정치 발언의 연장선에 있다는 해석이 많다. ‘역사는 선악의 논리가 아닌 힘의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나라의 힘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체제가 아닌) 개인’이라는 책의 주제가 보수주의의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 부회장은 1월20일 자신의 SNS 활동 복귀를 전한 기사 제목과 보도사진(정 부회장 얼굴 사진)을 캡처해 게재하며 ‘뭘 째려보냐’ ‘아주 맘에 안 드는 저 눈빛’ 등 예전처럼 익살스러운 내용의 해시태그를 달았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단순히 정 부회장 개인의 ‘힙한’ 이미지와 신세계 브랜드, 제품 등을 홍보하기 위해 운영됐던 SNS가 논란을 통해 2.0 버전으로 진화하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면서 “정 부회장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엄청난 위험부담을 감수한 끝에 재벌 오너의 스테레오 타입을 깨버렸으니 앞으로 더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 발언권을 활용할 듯하다”고 관측했다. 

 

‘재벌 손보기’와 ‘여론 뭇매’는 옛말? 

정 부회장의 사례는 과거 재계에서 몇몇 오너가 정치적 발언으로 설화에 오른 것과는 궤가 다르다. 화장품 제조업자개발생산(ODM)기업 한국콜마의 윤동한 회장은 2019년 8월 사내 월례조회에서 임직원 700여 명에게 극우 유튜버 영상을 시청토록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에 휩싸였다. 해당 영상에서 유튜버는 “아베(당시 일본 총리)는 문재인(대통령) 면상을 주먹으로 치지 않은 것만 해도 너무나 대단한 지도자다” “베네수엘라의 여자들은 단돈 7달러에 몸을 팔고 있고, 곧 우리나라도 그 꼴이 날 것”이라는 등 부적절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윤 회장은 영상 시청이 끝난 후 간접적으로 유튜버 발언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콜마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급기야 윤 회장이 논란 발생 나흘 만에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그가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하기까지는 2년3개월이 걸렸다. 

김영식 전 천호식품 회장은 2016년 11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촛불집회를 비판하는 글과 동영상을 올렸다. 김 전 회장은 ‘나라가 걱정됩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촛불시위, 데모, 옛날이야기 파헤치는 언론 등 왜 이런지 모르겠다. 국정이 흔들리면 나라가 위험해진다”며 “똘똘 뭉친 국민 건드리면 겁나는 나라, 일당백하는 나라 이런 생각이 들도록 해야 되는데,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보는 시각이 무섭다”고 밝혔다. 이후 급격히 악화된 여론은 김 전 회장의 대국민 사과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곧이어 천호식품의 가짜 원료 문제까지 터지자 김 전 회장은 2017년 1월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장남에게로의 경영권 승계가 무산되고, 김 전 회장 일가의 보유 지분도 모두 매각하게 됐다. 

두 사례와 달리 정 부회장과 신세계는 별다른 위기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 현재로선 정치적 보복이나 경영 위기를 겪을 가능성도 그리 심각하게 거론되지 않는다. 앞서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5년 4월 출장차 방문했던 중국 베이징에서 주요 언론사 특파원들과 만나 “우리나라의 정치력은 4류, 행정력은 3류, 기업 능력은 2류”라고 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부의 경제정책 난맥상과 관료주의 행태를 꼬집은 발언이라는 풀이가 뒤따랐고, 당연히 김영삼 당시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이 회장은 이듬해 터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그 뒤로 이 회장이 공식 석상에서 정치 발언을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1998년 1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 참석했다가 당시 김 당선자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유종근 경제고문과 설전을 벌였다. 김 회장은 유 고문에게 “최근 위기가 금융 부실에서 비롯된 것인데 재벌 등 대기업들만 몰아붙이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정부가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던 재벌 개혁과 기업 간 사업 교환(빅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김 회장은 이후 차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으로 내정된 뒤에도 “재벌 해체론은 선진국이 국내시장 잠식과 경쟁 상대인 우리 대기업의 제거를 위해 내세우는 논리”라며 김대중 정부의 재벌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삼성·현대와 함께 재계 1위를 다투던 대우는 41조원 규모의 분식회계와 불법대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나면서 1999년 11월 공중분해됐다. 김 회장 등 핵심 경영진은 사법처리를 받았다.

ⓒ시사저널 박은숙·연합뉴스

“정계 입문, 기업활동 그만둔 후에 해야” 

지금이 정권 말기인 점을 감안해도 재벌 오너들에게 정치 발언은 금기 중 금기로 통한다. 더구나 대선 향방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결국 정 부회장의 소신 행보는 특유의 인플루언서 기질과 바뀐 정치·여론 지형이 합쳐진 결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실제로 정 부회장은 안티와 함께 지지층도 대거 보유하게 됐다. 정 부회장의 SNS 게시물에는 그를 따라 ‘멸공’ ‘필승’ 해시태그를 사용해 응원 댓글을 다는 이용자가 넘쳐난다.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는 물론 기성언론에서도 정 부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장은 정 부회장의 최근 행보에 대해 “우리나라 경제는 유독 정치와 진영 논리에 휘둘려 왔고 심지어 분단이라는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안고 있다. 정 부회장이 어떤 토양이 기업을 하기 좋은지 너무나 잘 아는 기업인으로서 멸공이란 키워드에 많은 메시지를 함축해 화두를 던졌다”며 “혹자는 그가 무책임하다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책임감이 강한 거라 생각한다. 정치인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으니 기업 하는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고 나서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노 전 회장은 “이마트 노조에서 정 부회장의 행동으로 회사에 피해가 미칠까 우려돼 반발하고, 정 부회장이 이에 수긍한 것도 자연스럽고 마땅한 과정”이라면서도 “여당 정치인들이 나서서 한 기업인에 대해 집중포화를 퍼붓고 신세계 불매운동까지 독려하는 행위는 다른 차원의 ‘재벌 손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정 부회장이 정계에 진출할 여지는 있을까. 일단 당사자는 강하게 일축했다. 정 부회장은 1월10일 SNS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사업하는 집에 태어나 사업가로 살다 죽을 것”이라며 “진로 고민 없으니까 정치 운운 마시라”고 말했다. 임영균 광운대 경영학부 명예교수는 “정 부회장이 앞으로 자신의 행보를 어떻게 꾸려 갈지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기업인이 특정한 정치적 이념을 특정한 정치세력을 통해 드러내려면 기업활동을 완전히 그만둔 다음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단순한 SNS 활동에 있어서도 기업이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뤄진 공동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주지하고 임직원, 주주 등을 더욱 생각하며 신중히 움직여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 정치에 직접 뛰어들었던 현대家…결과는?  

재계에서 오너 일가가 직접 정치에 뛰어든 사례는 현대그룹이 유일하다. 그만큼 기업 경영과 정치활동의 공존이 어렵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현대 창업자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2년 1월 그룹 경영 은퇴를 발표하며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당시 그는 “경제에서 정치로 활동 영역을 바꾸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통일국민당을 창당한 정 명예회장은 그해 12월 제14대 대통령선거에까지 출마한다. 결과는 김영삼·김대중 후보에 이은 3위 낙선이었다. 

낙선 후 정 명예회장은 선거운동을 도왔던 아들들(고 정몽헌, 정몽준)과 함께 비자금 수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는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기간 내내 현대는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 당시 현대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의 정계 진출 후 현대 임직원들이 신당 창당과 대선 과정에 동원되는 등 지금 생각하면 구시대적이고 비합리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며 “우리 경제 펀더멘털이 그리 튼튼하지 않고 정권 차원의 재벌 길들이기도 극심할 때라 현대의 중간간부 이상 구성원들은 정 명예회장의 밀어붙이기식 정치 도전에 강한 우려를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결국 정치에서 손을 뗀 정 명예회장은 다시 본무대인 재계로 돌아왔다. 그에게 큰 시련을 안긴 정치였지만, 재계의 큰 별로 다시 떠오르게 한 것도 정치였다. 1998년 대북 정경분리 원칙 및 대북 포용정책을 들고나온 김대중 정부의 등장은 정 명예회장의 숙원인 대북사업에 돌파구를 열어줬다.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현대중공업그룹 대주주는 32세였던 1982년 사장, 37세였던 1987년 회장 자리에 올랐다. 사내 1인자가 된 이듬해 자동차·조선·철강부문을 포함한 현대 계열사들이 포진한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정 대주주는 아버지의 정치 도전 실패를 상쇄해야 한다는 부담과 의무를 가득 안고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14, 15, 16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4번 연속으로 당선되며 가문의 최종 목표인 대통령직에 성큼성큼 다가섰다. 아무리 국내 굴지의 재벌가라도 대권 꿈은 끝내 이룰 수 없었다. 정 대주주는 2002년 대선에 뛰어들었다가 당시 민주당 후보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밀려 출마를 포기했다. 17대, 18대, 19대까지 총 7차례 국회의원 임기를 수행한 정 대주주는 현재 기업인이자 사회단체(아산사회복지재단) 대표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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