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권한 주변에 미룬 듯한 정몽규 회장 태도가 문제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22.02.08 07:30
  • 호수 168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첩첩 악재’ 둘러싸인 HDC현대산업개발…현산 측 “정 회장, 대주주로서 사태 수습 챙기고 있다” 

정몽규 HDC그룹 회장과 만나거나 함께 일해본 이들 다수는 그에 대해 ‘샤이(shy)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즐겨 읽는 독서광으로도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룹 경영이나 대한축구협회 회장직 수행 등에서 정 회장이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HDC현대산업개발(이하 현산)이 지난해 6월과 올해 1월 연이어 대형 사고를 내면서 정 회장은 반강제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됐다. 그룹 전체와 가문의 명운까지 온전히 그의 리더십에 달린 상황이다. 현재까지는 현산과 정 회장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전망이 주를 이룬다. 더 나아가 이번 사태의 본질이 ‘오너 리스크’라고까지 보는 시선도 있다.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 

정몽규 HDC그룹 회장이 1월17일 서울 용산 HDC현대산업개발 본사에서 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 관한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시사저널 박정훈

역대 사장단 동원해 수습 나서 

시사저널 취재를 종합한 결과, 정 회장은 최근 현산 회장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물밑에서 사태 수습과 조직 쇄신 작업에 관여해 왔다. 1월11일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외벽 붕괴 사고 발생 후 침묵하던 정 회장은 6일 만에 기자회견을 열어 대국민 사과문과 회장직 사퇴 계획을 발표하면서 “경영자로서 물러나지만, 대주주의 책임은 다하겠다”고 밝혔다. 현산 관계자는 “정 회장이 광주와 서울을 계속 오가며 사태 수습 과정을 챙기고 있고 (주가 방어를 위해) 현산 주식도 매입했다”면서 “HDC그룹 전체가 직면한 문제니만큼 (대주주로서) 해결책 마련을 위해 전 계열사 임직원들과 같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현산이 1월20일 ‘비상안전위원회’를 신설한 데도 정 회장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위원회는 화정아이파크 사고 처리와 입주 예정자 등에 대한 피해 보상을 담당하는 사내 기구다. 흥미로운 대목은 위원회가 현산의 역대 사장단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위원장은 이방주 전 현산 부회장이 맡았다. 이 전 부회장은 1969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관리본부장, 재경본부장, 대표이사 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1999년 현산으로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정 회장 부자(父子)와 함께 옮겨왔다. 현산이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한 후 독자 생존에 성공하고, 오히려 계열사 시절보다 월등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아 익명을 요구한 건설업계 관계자는 “현산에서 2008년 이 전 부회장이 퇴직한 후 다른 노련한 건설 전문가들도 우수수 이탈했다. 축적된 숙련 인력과 도제식 교육체계가 사라져버린 게 사태의 출발점”이라며 “전문성과 위기관리 능력이 현격히 저하됐는데도 현산에서 경각심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정 회장 특성상 조직을 카리스마 있게 다잡지도 못한 탓에 잠재 리스크가 점점 증폭되다가 폭발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동안 수주를 많이 따내고 시공능력평가 상위권(2021년 기준 9위)에 랭크되며 자신만만했을 텐데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면서 “위기 타개책 마련을 이 전 부회장 등 ‘올드 보이’들에게 맡김으로써 스스로의 오만과 오판을 자인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비상안전위원회는 사태 수습 외에 견고한 건설안전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최고안전관리책임자(CSO·Chief Safety Officer) 직책을 도입하고, 경영진 쇄신을 포함한 안전혁신 방안을 수립하는 역할도 맡는다고 현산 측은 설명했다. 

붕괴 사고가 난 광주 화정아이파크 201동 모습ⓒ시사저널 임준선

잇단 법적 리스크에 주가 폭락까지 

이런 노력에도 그룹 상황은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다. 당장 법적 리스크가 실시간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이다. 경찰 수사를 통해 현산의 화정아이파크 외벽 붕괴 사고 과실 관련성이 속속 제기되는 중이다. 노형욱 국토교통부 장관은 현산을 놓고 “한 번도 아니고 반복적으로 큰 사고를 냈다. 법이 규정한 가장 강한 페널티(처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일단 사고 책임자에 대해 전례 없이 강도 높은 처벌이 가해짐은 물론 회사에도 건설업 등록말소 등의 중징계가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한다. 

현산의 수주 사업 현장에선 계약 해지 요구가 잇따르고, 아이파크 브랜드 퇴출 움직임까지 나타난다. 향후 공공 공사는 물론 재건축·재개발 사업 등 신규 수주에도 큰 타격이 예고된다. 화정아이파크 사고 다음 날인 1월12일 전 거래일보다 19.03% 폭락한 2만850원에 거래를 마친 현산 주가는 1월28일 1만4450원까지 더 내려왔다. 1월 월간 하락률은 36.90%에 이른다. HDC가 정 회장 의지에 따라 1월13일부터 17일까지 현산 보통주 100만3407주를 장내 매수했지만, 기대했던 주가 방어 효과는 없었다. 

성난 여론은 잠잠해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역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현대산업개발 퇴출 및 학동·화정동참사시민대책위원회’는 1월30일 화정아이파크 사고 현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현산의 책임 있는 수습과 건설업계 영구 퇴출을 촉구했다. 이들은 2월 중순께 현산 퇴출을 촉구하고 현산 측의 책임 있는 사고 수습을 촉구하는 상경 투쟁을 할 방침이다. 

정 회장이 앞으로 현산 경영을 유병규 사장과 하원기 전무 등 두 대표이사에게 일임하겠다고 천명했으나, 비난의 화살은 정 회장에게만 더욱 집중되는 형국이다.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 특성상 전문경영인의 권한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알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2018년 그룹을 지주사 체제로 전환한 후 현산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장직만 유지하면서도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 

 

모든 비판, 결국 오너 리더십으로 향해 

현실에 아랑곳없이 책임과 권한을 자꾸 주변에 미루는 듯한 정 회장의 ‘샤이’한 태도는 진정성 있는 사태 수습과 신뢰 회복 노력을 촉구해온 국민 눈높이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화정아이파크 사고 실종자 가족들 사이에선 정 회장의 현산 회장직 사퇴에 대해 “면피성 조치에 불과하다”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들은 정 회장이 2선으로 후퇴할 게 아니라 응당한 책임을 지고 처벌받아야 한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건설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정부가 그간 수요 억제에만 치중하다가 공급 대책으로 급하게 돌아서는 바람에 현산을 비롯한 수많은 건설사가 능력 밖의 수주 물량을 소화하게 됐다. 현장의 관리인력 부족, 외국인으로 채워진 기능공 등 문제는 어느 건설사나 마찬가지로 내포하고 있다”면서도 “현산이 수주한 현장에서 사고가 터지고, 특히 정 회장에게 십자포화가 쏟아지는 것은 그만큼 오너 리더십 부족에 따른 부실 요인이 컸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이어 그는 “정 회장이 지금처럼 안일한 대처로 일관하거나 혹여 ‘등록말소 시 다른 법인을 통해 대리 수주하겠다’는 등 상식 밖의 구상을 들고나올 경우 국민 공분만 더욱 증폭될 것”이라며 “현산을 필두로 건설업계, 정부 모두가 환골탈태하지 않으면 후진국형 사고로 20년 정도 후퇴한 한국 건설업이 회복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대국민 사과 뒤 앞으로의 행보에 관해 “(현산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지는 심사숙고해 말씀드리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왼쪽, 당시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1999년 3월5일 현대차 서울 계동 사옥에서 아들 정몽규 회장(당시 현대차 회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 보는 가운데 현대차 경영권 이양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 아버지의 한 풀려 질주하다 오히려 벼랑 끝에 

자동차 경영과 가문 명예 회복에 대한 미련 여전

정몽규 회장은 1월17일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에서 “현산은 1976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로 시작해 국민의 신뢰로 성장했으나 최근 광주에서 2건의 사고로 너무나 큰 실망을 드렸다”며 “아파트의 안전은 물론 회사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고 밝혔다. 그는 “1999년 현대차에서 현산으로 옮겨 23년 동안 회사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국민의 신뢰를 지키고자 노력했는데 이번 사고로 그런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고도 했다. 

재벌 대기업 오너가 대국민 사과문에 회사의 연혁과 개인적인 회한까지 절절히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HDC가(家)의 한(恨) 많은 역사가 묻어난 내용이란 해석이 뒤따랐다. 

정 회장의 굳은 표정은 자연스레 아버지인 고 정세영 명예회장과 함께 현대그룹을 떠나온 시절과 오버랩됐다. 1999년 3월 정 회장(당시 현대차 회장)은 정 명예회장(당시 현대차 대표이사 명예회장 겸 이사회 의장)의 손에 이끌려 현산으로 오게 된다. 27세였던 1988년 현대차 대리로 입사한 뒤 1990년 이사, 1991년 상무이사, 1992년 전무이사, 1993년 부사장을 거쳐 1996년 회장 자리에까지 오른 정 회장이었다. 현대차 ‘포니 신화’를 만든 아버지를 도우며 후계 수업을 착착 받았는데, 큰아버지인 고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게 물거품으로 변했다. 장자 정몽구 현대차 명예회장(당시 현대 회장)에게 현대차를 물려주겠다는 통보였다. 

당시 관련 기자회견 자리에서 침울한 얼굴로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정 회장과, 이어진 현대차 회장 이임식을 치르며 눈물까지 흘린 정 명예회장의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정 회장이 23년이 흐른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현대차에서 현산으로 옮긴’ 사실을 언급한 배경엔 자동차 경영과 가문의 명예 회복에 대한 여전한 미련이 깔려 있다는 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에선 정 회장이 과거와 완전히 작별해야만 최소한 회생이라도 기대해볼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업 다각화, ‘종합 모빌리티그룹’에 이은 ‘국내 최고 디벨로퍼(종합부동산개발사)’ 비전 수립, 대한축구협회 회장직 3연임 등 정 회장의 업적들은 이제 고스란히 그를 공격하는 도구로 뒤바뀌었다. 건설업을 그저 돈 벌어주는 캐시카우 정도로 인식하고 가문의 숙원을 이루려 홀로 질주하다가 현재에 이르게 됐다는 지적이 쏟아져 나온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