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국민 술 시장 넘본다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2.02.22 11:00
  • 호수 168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홈술 시장’ 주류로 떠올라
‘와인 열풍’ 합류한 편의점, 근거리 구매처로 급부상

그동안 ‘국민 주류’로 불렸던 건 소주와 맥주였다. 주류계의 양대 산맥처럼 여겨진 두 술은 때로는 따로, 때로는 섞이면서 주류 시장을 견인해 왔다. 외식 시장이 그들의 주 무대였다. 지금은 어떨까. ‘홈술’ 시장으로 술의 무대가 이동했다. 취하려고 마시는 건 옛말이 됐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술 자체를 즐기기 위한 방향으로 음주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이제 알코올 내음 가득한 술 대신, ‘즐길 수 있는 술’ ‘맛있는 술’이 각광을 받는다. 이 트렌드의 중심에 와인이 있다. 2년 사이 와인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유통가는 새로운 대세에 따라 와인 시장을 정조준한다. 와인은 이제 홈술·혼술 트렌드의 최고 수혜‘주(酒)’로 불리며 주류(酒類) 시장의 주류(主流)로 올라서고 있다.

서울 종로구의 한 와인 특화 편의점에 다양한 와인이 진열되어 있다. ⓒ시사저널 최준필

저가 와인이 대중화 이끌어

글로벌 와인 리서치 기관인 와인 인텔리전스는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와인 시장’ 2위로 한국을 선정했다. 실제로 국내 와인 시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와인 소매시장의 매출은 이미 2020년 7347억원을 넘겼고, 올해는 1조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와인 시장에서 유통되는 와인 중 90% 이상은 수입 와인이다. 매년 늘어나는 와인 수입 규모가 와인 시장의 성장을 입증한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9년 2억5925만 달러였던 와인 수입액은 2020년 3억3001만 달러로 27.3% 증가했고, 2021년에는 5억5981만 달러로 전년 대비 70% 가까이 증가했다(2008년 와인 수입액은 2890만 달러에 불과했다). 와인 수입량도 2019년 4만3495톤에서 2021년 7만6575톤으로 크게 늘어났다.

와인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와인은 ‘마시고 죽는 술’이라는 이미지보다 ‘분위기 있는 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하면서 회식은 줄어들었고, 집에서 가볍게 술을 마시는 ‘홈술’ 문화가 생겨났다. 관세청은 “코로나로 인한 회식, 모임 자제 영향에도 지난해 주류 수입액이 역대 최대를 기록한 것은 와인 수입이 늘어나며 전체 주류 수입을 견인한 결과”라며 “코로나 시대에 회식보다 홈술·혼술 문화가 자리 잡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주류가 인기를 끌면서 와인 수요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와인은 홈술 시장을 견인하던 맥주의 수입액도 제쳤다. 2019년까지 주류 수입액 1위는 맥주였지만, 2020년부터는 와인이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국내 수제 맥주 시장의 성장과 와인의 인기가 맞물린 결과다. 2020년 1~7월 와인 수입액은 1억6000만 달러, 맥주 수입액은 1억4000만 달러였다. 2021년 1~7월 와인 수입액은 3억2500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고, 맥주 수입액은 1억30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와인이 다양한 음식과 곁들여지면서 레드 와인 일색이던 시장도 변했다. 아직까지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레드 와인이지만, 화이트 와인 수입도 늘어나는 추세다. 스파클링 와인의 지난해 수입량도 최고치를 찍었다.

 

와인을 찾는 수요는 가격이 뒷받침한다. 와인 수입선이 다변화되면서 가격이 저렴해진 데다,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저가 와인이 대거 유통되면서 와인 시장의 저변은 넓어졌다. 커피 한 잔 가격, 5000원 이하 와인이 시중에서 인기리에 팔린다. 이마트의 도스 코파스(4900원), 홈플러스의 카퍼 릿지(4990원), 롯데마트의 레알 푸엔테(3900원) 등이 대표적이다. ‘와인 초심자’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다. 대형마트가 칠레 등의 현지 와이너리와 협상해 와인을 들여오는데, 대규모 물량을 주문해 현지보다 판매가가 저렴한 경우도 많다. 도스 코파스는 출시 이후 누적 400만 병 이상 팔리면서 저가 와인의 인기를 입증했다. 초저가 와인으로 와인 시장에 진입한 소비자들은 더 비싼 와인으로도 눈을 돌린다. 롯데마트에서 7만원대로 할인판매한 스파클링 와인인 모엣 샹동 임페리얼은 매출 상위권에 진입했다. 평소 30만원이 넘는 가격이지만, 이마트가 한정 수량에 한해 18만원에 판매한 페리에 주에 벨에포크는 매출 상위 10위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온라인을 만난 와인의 성장 

와인 진입장벽을 한번 더 허문 것은 구매 방식이다. 이전에는 주류를 현장에서만 구매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20년 3월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주류를 온라인을 통해 사전에 예약·구매하고 원하는 매장에서 찾아갈 수 있는 스마트 오더 시스템이 가능해졌다(배송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직접 현장에서 와인을 보고, 고르고, 결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줄어들면서 수요는 늘어났다. 온라인에서 와인에 대한 정보를 부담 없이 검색해볼 수 있다는 점, 온라인몰의 쿠폰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도 주효했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주세법 개정 이후 한 달간 신세계 와인하우스의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45.9% 증가했다.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수입 와인의 소비자 가격은 더 하락했고, 이는 또 와인의 소비를 견인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국소비자원은 지난해 7월 ‘수입 와인 가격 및 소비실태 조사’ 보고서를 통해 “수입 와인의 소비자 가격 하락의 대표적인 요인으로는 편의점·마트 등 대형 유통사들의 가격 경쟁이 있다”며 “와인 관련 휴대전화 앱, 주류 스마트 오더, 와인 동호회 카페 등의 영향으로 소비자가 수입 와인의 가격을 비교하기 쉽게 변화된 시장 환경 또한 소비자 가격 하락의 간접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특히 편의점은 스마트 오더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다. 백화점이나 마트를 찾아가지 않아도 집 근처에서 와인을 살 수 있다는 매력. 이는 ‘슬세권’을 지향하는 코로나19 시국의 추세와 맞물렸고, 편의점은 핵심 와인 공급처로 거듭날 수 있었다. 최소 몇 시간~며칠 전에 와인을 주문하고 픽업하기 때문에 공간이 충분하지 않은 편의점도 와인 재고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이와 더불어 소비자가 와인을 쉽게 고를 수 있는 큐레이팅 서비스 경쟁도 치열해졌다. GS25는 와인25플러스를 통해 와인을 추천하고, CU는 유명 와인 유튜버인 와인킹과 손잡고 와인 선정에 나섰다. 세븐일레븐은 소믈리에 자격증을 보유한 MD가 직접 추천하는 와인 리스트를 공개하고 있다. 온라인 판매가 시장의 활성화를 이끌면서, 온라인 쇼핑을 주로 하고 자신의 경험을 온라인을 통해 공유하는 것에 익숙한 MZ세대를 중심으로 ‘와린이(와인+어린이)’도 늘어나는 추세다.

신세계L&B가 운영하는 와인앤모어 매장 ⓒ 시사저널 이종현
신세계L&B가 운영하는 와인앤모어 매장 ⓒ 시사저널 이종현
서울 잠실 제타플렉스의 대형 와인숍 보틀벙커 ⓒ 시사저널 이종현
서울 제타플렉스 잠실점의 대형 와인숍 보틀벙커 ⓒ 시사저널 이종현

대기업·편의점 등 와인 집중 공세 나서

시장은 커졌고, 와인의 객단가(고객 1명의 평균 구매가격)는 맥주나 소주보다 높다. 유통업계도 와인에 취할 수밖에 없다. 2008년 설립한 신세계L&B를 알짜 계열사로 성장시키며 와인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신세계는 자체 주류 전문점인 와인앤모어 매장을 지난해 말 기준 44개로 대폭 확대했다. 최근에는 미국 나파밸리의 프리미엄 와이너리인 쉐이퍼 빈야드를 인수했다. 지난해 초 와인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롯데마트는 와인 전문매장에 힘을 싣고 있다. 서울 제타플렉스 잠실점에 오픈한 대형 와인숍 보틀벙커가 대표적이다. 1만원대부터 1억원 안팎까지 다양한 가격대의 와인을 판매하고, 시음할 수 있는 테이스팅 탭을 운영하는 등 오프라인에서의 직접 경험을 부각하고 나섰다. 하이트진로는 MZ세대를 겨냥해 샴페인, 오렌지 와인처럼 주류 트렌드에 맞는 와인을 출시하는 등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다.

특히 근거리 구매처로 급부상한 편의점 업계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해 편의점 와인 매출은 2~3배 급증했다. 세븐일레븐 와인 매출은 1년 전보다 204.4% 늘었고, GS25는 158.3%, 이마트24는 106%, CU는 101.9% 성장했다. 편의점에서 직접 내놓은 시그니처 브랜드도 대중에게 인기다. CU가 이탈리아 와이너리 피치니에서 생산하는 ‘음’ 시리즈는 2016년부터 5년 동안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던 디아블로 카베르네 소비뇽을 제치고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대다수 편의점이 와인 종류를 대폭 늘리고 와인 특화존이나 와인 전용존을 확장하고 있어, ‘와인 슬세권’은 더 넓어질 전망이다.

연말에 판매량이 집중됐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 와인은 계절을 타지 않는 추세다. 맥주처럼 스테디셀러 반열에 오른 와인은 주류 시장을 변모시킬 새로운 게임 체인저로 주목받고 있다. 와인업계 점유율 상위 업체(신세계L&B·아영그룹·금양인터내셔날) 모두 지난해 역대 최고 매출을 넘어섰다. 와인 수입·유통업체의 증시 입성도 와인 시장의 팽창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라셀라와 금양인터내셔날이 IPO를 추진하고 있다. 증시에 입성하면 국내 첫 와인 수입 상장사가 된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