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영웅’ 송해, 끔찍할 정도의 몰입으로 탄생했다
  •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 송해 평전 『나는 딴따라다』저자 (poemoh@naver.com)
  • 승인 2022.06.10 12:00
  • 호수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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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 현역 송해 선생 추모기…한국 근현대사의 고난 아로새겨진 삶
《전국노래자랑》은 외모·학력·경제력 콤플렉스가 사라진 해방 공간

33년 동안 전국을 유랑하며 일요일마다 포효하듯 “전국~~~ 노래자랑”을 외치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만 95세가 되도록 무대를 찌렁찌렁 울리던 청춘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근엄한 외모지만 누구에게나 오빠가 되고 형이 돼주었던 큰 어른이 사라졌다. 검색어에 그 이름만 떠도 (그의 건강에 무슨 일이 있을까봐) 가슴이 철렁한다던 그 일이 마침내 터지고 말았다.

송해는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근현대 대중문화사의 거대한 박물관이다. 그는 1927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을 거치며 성년이 되었고, 성년이 되자마자 온몸으로 한국전쟁을 겪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그는 그것이 영원한 이별인지도 모르면서 가족과 생이별했다.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당시로서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피난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사람들은 그의 ‘현재’만 보고 그에게 환호하지만, 그의 삶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고난의 세월이 아로새겨져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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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직후 유랑극단의 ‘딴따라’로 전전

송해 선생이 유랑극단의 말단 단원으로 전국을 떠돌 때, 그에겐 안정된 현재도, 보장된 미래도 없었다. 그는 황야에 버려진 어린 짐승처럼 한 치 앞도 모른 채 역사의 사막을 배회했다. 전쟁 직후 그는 ‘연예인’이 아니라 천대받는 ‘딴따라’로 전국을 누비며 가수로, 사회자로, 댄서로, 막간극의 코미디언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그때 장르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주어진 역할을 하면서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기예를 자신도 모르게 익혔는데, 그것이 먼 훗날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로서 그가 갖춰어야 할 종합적인 능력 쌓기의 과정이었음을 본인은 물론 아무도 몰랐다. 경제 개발기에도 늘 대중문화의 중심에 있었지만 가수로도, 코미디언으로도, 사회자로도 그는 A급이 아니었다. 그는 대중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여전히 가난했고, 외로웠고,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두려웠다.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그의 재능과 뚝심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그의 나이 만 61세에 《전국노래자랑》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그때까지 갈고닦은 웃음과 노래와 임기응변의 능력을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쏟아냈다. 민중적 해학으로 가득 찬 이 무대는 코미디와 노래와 애드리브로 단련된 송해에게는 적성에 가장 잘 맞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그의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과 푸근한 풍채는 가난하고 못 배운 서민들에게 아버지 같은 위로와 사랑의 넉넉한 품으로 다가왔다. 그러므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로서의 그의 성공은 유랑극단 시절부터 1960~70년대 라디오, TV 방송을 거치면서 그가 쌓아온 종합적인 기예와 다정다감하고 포용력 넘치는 그의 인간미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다. 그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진다면, 오늘날의 《전국노래자랑》과 송해는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전국노래자랑》은 30여 년 동안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해 왔다. 많은 사람이 이를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국노래자랑》은 겉보기와 달리 매우 파격적이며 전복적인 프로그램이다. 대부분의 방송 프로그램은 고학력, 중산층, 지배계급의 취향과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많이 배우고,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들이 시장을 점유하고, 방송을 장악하고, 교육을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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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15일 송해가 출연한 마지막 《전국노래자랑 스페셜 당진시》의 한 장면ⓒ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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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95세 현역 MC인 송해가 TV 음악 프로그램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등재됐을 당시 모습ⓒ연합뉴스

대중문화 속 지배 이데올로기 통렬하게 전복 

소위 사회적 통념을 벗어나는 방송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이 의외로 계급적인 대중문화의 구도 안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차지하는 지위는 독특하다. 《전국노래자랑》은 모두를 주눅 들게 하는 학력과 외모와 경제력의 콤플렉스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 무대에서 사람들은 꼭 가방끈이 길 필요도 없고, 성형을 한 얼굴을 디밀 필요도 없으며, 멋진 패션으로 위장하거나, 돈 자랑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기는커녕 이 무대의 주인공들은 거꾸로 무식을 과장하거나,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를 전경화하거나, 가난한 생계를 내놓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전국노래자랑》은 교육받은 중산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면에서 희화화하는, 전복적이며 횡단적인 무대다. 다른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열등감을 내면화하는 많은 시청자가 (또한 무의식적으로) 이 무대에 열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철저하게 민중적이고 반통념적인 무대의 중심에 송해가 있다. 송해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송해의 외모를 찬찬히 들여다보라. 그는 의외로 권위적이며 근엄한 얼굴의 소유자이고, 키는 작지만 (속된 말로) ‘있어 보이는’(?) 넉넉한 풍채를 가지고 있다. 근접하기 어려운 외모의 이 노인은 그러나 무대에 나오는 거의 ‘무대뽀’의 출연자들 앞에서 마구 망가지고 무너진다. 아무나 그의 몸을 만질 수 있으며, 뺨에 가벼운 뽀뽀를 할 수도 있고, 나이 불문 오빠나 형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거친 농담을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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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C 송해의 《전국노래자랑》 진행 모습ⓒKBS1

《전국노래자랑》의 민중적 분위기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페르소나는 없을 것이다. 《전국노래자랑》 출연자들은 이렇게 사회적 통념을 횡단하고 엄숙하고 권위적인 외모의 나이 든 사회자를 가로지르며 해방감을 만끽한다. 이것이야말로 ‘억압된 것’의 분출이고 회귀다. 《전국노래자랑》의 민중적 웃음은, 이렇게 사회적 통념을 조롱하고, 자신의 현재를 자신 있게 드러내는 출연자들과, 그것을 유도하고 방조하며 응원하는 사회자와, 그것에 열광하는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힘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그러니 이 무대는 재미를 넘어 얼마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인가.

 KBS2 《여러분 고맙습니다 송해》의 스틸컷ⓒKBS2
 송해는 2011년 추석을 목표로 단독 콘서트를 준비해 성공리에 서울 공연을 마치고 10월까지 전국 순회공연을 진행했다. 생애 첫 콘서트이며 이름하여 《(나팔꽃 인생) 60년 송해 빅쇼》 포스터ⓒ에이엠지로벌 제공
2014년 1월17일 발매된 송해쏭 《신명나는 세상》 음반 표지ⓒ에이엠지로벌 제공

숟갈에 반찬 올려주던 낙원동 식당의 추억

송해는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한 콜라보가 되도록 끌어올리는 구심점이다. 그리고 송해의 이런 능력은 단순한 기교나 기술이 아니라, 그가 한국 근현대사와 함께 겪어온 고난의 세월 그리고 그의 타고난 성품을 통해 서서히 준비되고 완성돼온 것이다. 그의 평전 《나는 딴따라다》를 쓰기 위해 근 1년여 동안 그를 매일 만나면서 필자는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성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매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면식을 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어느 날, 그와 함께 서울 낙원동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그는 밥을 뜨는 나의 숟가락에 일일이 반찬을 집어서 올려주었다. 그때 이미 오십 후반의 중늙은이가 다 된 나는 마치 엄마에게 밥을 얻어먹는 어린아이처럼 완전히 무장해제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 만날 때마다 손을 잡거나 포옹하기를 좋아했는데, 이것은 그가 꼭 나에게만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누구를 만나도 손부터 잡고 환하게 웃으면서 그만의 다정다감을 선사했다.

그의 평전을 내고 기자회견을 하던 날에도, 긴장된 얼굴의 내게 다가온 그는 덥석 내 손을 꼭 잡아쥐고 무대 위로 끌고 올라갔다. 덕분에 순식간에 긴장과 어색함이 사라진 분위기에서 그와 나는 화기애애하게 기자회견을 끝낼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도 그는 매번 자신의 책상과 손님용 탁자와 의자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심지어 매일 가는 목욕탕에서도 다른 이들이 내팽개쳐 놓은 수건들을 하나하나 주워다 세탁 바구니에 넣는다. 송해의 이런 자상함과 다정함, 그리고 타인에 대한 정성 어린 배려는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출연자와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6월9일 대구 달성군 옥포읍 송해기념관에 故 송해를 추모하기 위한 임시 분향소와 근조 리본, 현수막 등이 설치돼 있다.ⓒ연합뉴스

다정다감함이 그의 내면이라면, 무대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쩌는 완벽주의의 그것이다. 이천몇백 회 이상 똑같은 무대에 서왔음에도 《전국노래자랑》을 녹화할 때마다 그는 마치 첫 무대에 서는 것처럼 초긴장 상태에 빠진다. 무대 위에서의 그의 모습만 보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녹화 이전에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녹화 때마다 매번 너무 긴장하는 탓에, 스태프들은 항상 우황청심환을 준비한다. 녹화 한 시간 전쯤 그는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우황청심환을 마시는데, 그러다가도 일단 무대에 올라가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치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처럼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무대를 장악한다. 가수로서 녹화 전에 리허설할 때도, 그는 매번 끔찍할 정도의 몰입과 집중과 헌신을 보여준다. 그 장면은 마치 종교적 제의에 임하는 사제처럼 엄숙한 아우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을 보며, 나는 숭고미(崇高美)라는 것이 고급예술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절감했다.

그런 그가, 95세의 짱짱한 현역이, 그의 영원할 것 같았던 ‘유랑 청춘’이 드디어 사라졌다. 벌써 그가 그립다. 그의 영원한 안식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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