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부터 메이브까지…가상 아이돌, K팝 산업 새 역사 쓸까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23.02.14 11:05
  • 호수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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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메타돌’ 메이브, 엔터업계에 어떤 물결 일으켰나
카카오·SM도 가상 엔터 산업에 본격 진출

첫 싱글 ‘판도라의 상자’를 발매한 걸그룹 메이브는 지난달 말 MBC 《쇼! 음악중심》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 무대를 펼쳤다. 데뷔곡은 《판도라》. 이 무대는 해당 프로그램의 1월 무대 중 최다 조회 수를 기록했다. 뮤직비디오 역시 13일 만에 1000만 조회 수를 돌파하며 상승세를 탔다. 신인 걸그룹으로서 기록할 만한 행보를 보이는 메이브에게 특별한 점이 있으니, 바로 이들이 ‘가상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사이버 가수 아담 이후 25년. 진화한 가상인간으로 구성된 새로운 걸그룹은 ‘MAKE NEW WAVE(메이크 뉴 웨이브)’를 줄여 만든 그룹명답게 높은 화제성을 입증하며 K팝 시장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걸그룹 전성시대를 맞이한 K팝 시장과 메타버스 세계관 사이에서 이 가상의 아이돌은 어떤 그림을 그려낼까. 메이브의 등장은 엔터 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넷마블에프앤씨의 자회사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함께 탄생시킨 4인조 걸그룹 메이브. 멤버들은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들이다.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
넷마블에프앤씨의 자회사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함께 탄생시킨 4인조 걸그룹 메이브. 멤버들은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들이다.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
1998년 데뷔한 국내 1호 사이버 가수 아담 ⓒ아담 1집 앨범

사이버 가수 아담 시작으로 25년 동안 진화

최초의 사이버 가수는 아담이다. 메이브의 까마득한 대선배인 셈이다. 국내 1호 사이버 가수 아담이 탄생한 시기는 1998년. 《세상엔 없는 사랑》을 비롯해 11곡이 담긴 음반을 들고 데뷔한 스무 살의 남성 가수는 가요 시장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아담을 개발한 아담소프트는 “기술적인 디지털 혁명의 시대는 이제 문화 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다”면서 “아담은 외형이 완성된 수준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인공지능, 목소리 합성 등의 기능을 부여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20만 장의 1집 음반을 판매하며 인기를 끌었던 아담은 2집을 통해 댄스 가수로의 변신을 시도했지만, 흥행에 참담하게 실패하며 가요 시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같은 해 데뷔한 여성 사이버 가수 류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전광판을 통해 시구를 하거나 1998년 지방선거에서 유력 후보와 영상 인터뷰를 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시도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아담이 군대에 갔다거나, 이들이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설도 돌았다. 당시 해외에서 데뷔한 사이버 가수들도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이들이 사라진 것은 막대한 비용 때문이었다. 직접 출연해야 하는 연예인의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영상처리 기술이 부족했다. 모션캡처와 3D 그래픽을 통해 움직임과 표정 변화를 구현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5~6명이 두 달을 고생해야 2~3분짜리 영상 하나를 제작하는 수준이었다. 스타트업 차원에서는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제작비용을 감당하기도 어려웠고, 당시의 가요 시장 규모가 작았기에 방송 출연료나 광고료는 활동을 이어가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모습을 한 번 드러내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다 보니 팬들과의 소통에도 실패했다. 전문가들은 “동영상 기술이나 비용 문제 때문에 쌍방향 교류를 하는 캐릭터를 아직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당시 아담소프트의 박종만 대표는 “향후 문자를 음성으로 합성하는 기술과 질문을 알아듣는 자연어 처리 기술이 상용화되면 사이버 인간들이 제2의 활동 시기를 맞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20년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가상인간의 제2 활동기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들은 ‘사이버 가수’ 대신 ‘가상(virtual) 아이돌’ 혹은 ‘메타(meta) 아이돌’이라 불린다. 최근의 가상 아이돌은 얼마나 사람에 가까운지, 즉 ‘실사화’가 얼마나 됐는지에 방점이 찍힌다. 2021년에는 버추얼 셀럽 제작사인 펄스나인이 탄생시킨 11인조 걸그룹 이터니티가 데뷔했다. K팝 아이돌 얼굴 데이터 수십만 장을 학습한 ‘AI 심쿵챌린지’를 통해 선발된 멤버들이다. 딥리얼 AI 기술을 통해 구현된 이들은 데뷔 초 부자연스러운 표정이나 몸짓으로 지적을 받았지만, 실시간 소통하는 콘텐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팬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최근 이터니티의 멤버 제인은 보이는 라디오와 웹 드라마, 뉴스 생방송에까지 출연했다. 지난해에는 현실 아이돌 4명과 가상 아이돌 1명으로 구성된 5인조 보이그룹 슈퍼카인드가 K팝 신에 등장했다. 가상 멤버 세진은 그룹의 센터 역할을 담당하며 주목을 받았다.

버추얼 셀럽 제작사인 펄스나인이 탄생시킨 11인조 가상 아이돌 이터니티. 이터니티는 마리끌레르 패션 화보도 촬영했다. ⓒ마리끌레르
버추얼 셀럽 제작사인 펄스나인이 탄생시킨 11인조 가상 아이돌 이터니티. 이터니티는 마리끌레르 패션 화보도 촬영했다. ⓒ마리끌레르
현실 아이돌 4명과 가상 아이돌 1명으로 구성된 5인조 보이그룹 슈퍼카인드 ⓒ슈퍼카인드 공식 트위터
현실 아이돌 4명과 가상 아이돌 1명으로 구성된 5인조 보이그룹 슈퍼카인드 ⓒ슈퍼카인드 공식 트위터

메타돌은 어떻게 존재감을 드러냈나

게임사의 기술력과 엔터 업계의 매니지먼트 역량이 만나면서 가상 아이돌은 더욱 진화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과 게임엔진 활용에 익숙한 게임 업계는 가상인간 개발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크래프톤의 애나, 스마일게이트의 한유아 등이 게임 업계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가상인간이다. 최근 음악방송을 통해 데뷔하며 K팝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메이브는 넷마블에프앤씨의 자회사 메타버스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합작한 결과물이다.

메타버스엔터는 자체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메이브에게 800개의 기본 표정을 탑재했고, 사람 목소리를 기반으로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과정을 통해 감정을 실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도화하는 작업을 거쳤다. 경기도 광명의 VFX연구소에 있는 모션 캡처 스튜디오에서 동작을 구현하는 안무 작업이 이뤄진다. 넷마블 관계자는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가상인간을 제작할 수 있는 차별화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세한 표정을 비롯해 자연스러운 액션이 실시간으로 나올 수 있도록 많은 연구와 개발을 진행했고,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메이브”라고 설명했다.

기술력과 함께 수반돼야 하는 것은 트렌드를 읽는 능력과 매니지먼트 역량이다. 기획은 2021년부터 메타버스엔터에 전략적 투자를 진행한 카카오엔터가 맡았다. 스타쉽, IST엔터, 이담엔터, 안테나 등 소속사들을 통해 매니지먼트 역량을 키워온 카카오엔터는 메이브에게 ‘감정의 자유를 찾아 미래에서 온 4명의 아이들이 2023년의 지구에 불시착했다’는 세계관을 설정했다. 데뷔곡 《판도라》는 세븐틴과 레드벨벳, 몬스타엑스의 히트곡을 만든 맥스쏭과 카일러 니코가 작업했고, 퍼포먼스는 아이브와 아이즈원의 안무를 담당했던 프리마인드가 구성했다.

그렇게 메이브가 데뷔 무대에 서기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첫 무대이고, 방송사에서도 가상 아이돌의 무대를 만드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작업을 고도화하는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됐다는 것이 제작사 측 설명이다. 다음 무대를 만들기 위한 시간은 더 단축될 수 있다. 비용으로 인해 가상인간의 활동이 제약을 받았던 과거와 달리,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속적인 활동이 가능하며, 정기적으로 무대에 서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로 구성된 걸그룹 K/DA ⓒK/DA 공식 인스타그램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로 구성된 걸그룹 K/DA ⓒK/DA 공식 인스타그램
카론유니버스의 버추얼 보이그룹 레볼루션 하트 ⓒ카론유니버스 공식 인스타그램
카론유니버스의 버추얼 보이그룹 레볼루션 하트 ⓒ카론유니버스 공식 인스타그램

“완성도 올라갈 경우 팬덤 형성 가능”

이제 진화한 가상 아이돌은 지상파 음악방송 무대에까지 진출하면서 활동 반경이 넓어졌음을 입증했다. 메이브는 K팝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과연 현실의 아이돌과 경쟁이 가능할까. 최광호 한국음악콘텐츠협회 사무총장은 “메이브와 같은 시도는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기존의 가상 아이돌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가상 아이돌의 완성도가 올라갈수록 대중의 관심도 커지게 된다.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실적 비주얼에 가까워지면서 해외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며 “음원차트 성적은 음악의 퀄리티나 노래의 대중성에 따라 좌우된다. 노래가 대중의 선택을 받는다면, 음원차트에서도 강세를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메이브의 《판도라》는 전 세계 K팝 스트리밍 사용량에 따라 집계되는 써클차트의 글로벌 차트에서 76위(2월5일 기준)에 오르며 100위권 안에 진입했다.

가상의 인물이라는 괴리감 탓에 아직까지 한계는 존재하지만, 팬덤을 형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미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게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이돌, 버추얼 아이돌 그룹을 향한 팬덤도 만들어진 바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로 구성된 걸그룹 K/DA, 국내 최초의 버추얼 보이그룹 레볼루션 하트 등은 각자 형태는 다르지만 가상의 아티스트가 대중의 인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아이돌들이다.

최 사무총장은 “콘텐츠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현실 아이돌은 실시간 소통이나 인터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아이돌 그룹의 행동 반경을 구현할 수 있는 수준의 기술적 완성도가 갖춰지기 전까지는 가상 아이돌에게 어색함을 느낄 수 있고, 그들의 활동에도 제약이 있을 것”이라며 “이런 부분이 보완된다면 가상 아이돌은 음악성과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K팝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있다. 메이브 이후의 시도들은 더 빠르게 전개되고 발전할 것이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기획·제작한 버추얼 걸그룹 데뷔 서바이벌 《소녀 리버스》. 전·현직 걸그룹 멤버들이 버추얼 캐릭터를 통해 경쟁한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상인간은 리스크가 없다’는 공식은 아이돌 산업에도 적용된다. 학교폭력 이슈나 왕따 논란, 개인 일탈행위로 인해 다른 멤버들이나 소속사가 피해를 볼 일도 없다. 시간과 장소, 심지어 건강과 체력에도 구애받지 않고 활동이 가능하다. 이미 가상인간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뿐만이 아니다. 메타버스라는 대안적 공간이 마련돼 있는 데다, AR(증강현실)과 VR(가상현실)이라는 기술을 통해서도 그들의 활동 반경은 더 넓어진다. 웹툰이나 웹소설 등 다른 영역으로의 콘텐츠 확장도 용이하다. 메이브도 카카오 웹툰과 웹소설로 향할 준비를 마치고, 현재 공개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가상세계와 엔터 업계를 잇는 산업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카카오엔터는 전·현직 걸그룹 멤버들이 버추얼 캐릭터를 통해 경쟁하는 《소녀 리버스》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초반에는 버추얼 캐릭터 활용에 대한 저작권 논란이 존재했지만, 참가자들의 몸짓과 표정을 포착하고 캐릭터를 통해 라이브로 송출하는 기술 등을 보여주며 가상 엔터 산업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 에스파를 통해 메타버스로의 진입로를 열었던 SM엔터테인먼트는 가상세계 속 에스파의 아바타인 æ-aespa를 서포트해 주는 조력자이자 안내자인 나이비스를 3월 중 가상 아티스트로 데뷔시킬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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