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을 넘어 ‘트로트 글로벌리티’를 꿈꾸다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2.26 10:05
  • 호수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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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 인기에 기댄 스타 중심의 마케팅에는 한계
끊임없이 진화하며 명맥 잇는 미국 컨트리 주목해야

우리가 K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때 ‘가요’라 불리던 K팝은 이제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 전 세계 대중음악 산업의 트렌드를 좌우하는 파워하우스 위치로까지 격상된 상태다. 인재와 돈, 관심이 그리로 쏠리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너무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국 대중문화가 K팝의 성장과 함께 그 위상과 격이 한껏 올라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한국 대중음악이 ‘로컬’을 벗어나 ‘글로벌’로 향하는 동안 가요에는 흥미로운 반동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최근 ‘트롯’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불리고 있는,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오래된 장르인 트로트가 그것이다.

트로트를 부르는 이름은 다양하다. 전통가요, 성인가요, 뽕짝, 그리고 트롯까지…. 이 각각의 이름에는 오랜 대중음악 장르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욕망이 담겨 있다. 트로트가 한국의 전통적인 대중음악 장르인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동시대에 한국 가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재즈나 스탠더드팝 역시도 전통가요의 한 가지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누구도 재즈나 스탠더드팝을 전통가요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말이다. 성인가요라는 수식도 일견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성인가요라는 것은 굳이 영미권 팝음악의 분류를 빌리자면 ‘어덜트 컨템포러리’라는 장르에 가까운 명칭이다.

지난해 대구에서 열린 K-트로트 페스티벌 행사 모습 ⓒYoutube 화면캡처

트로트의 정체성에 대한 새삼스러운 질문

주류 대중음악이 1020세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에 반해, 30대 이상 성인들이 즐겨 들을 만한 어른 취향의 대중음악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성인’들이 듣는 대중음악은 무엇일까. 트로트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포크, 발라드, 심지어 록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얼마든지 성인가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음악이라고 여겨지지만 1980년대 후반 처음 힙합과 전자음악을 듣던 청소년은 지금 어느덧 50대가 됐다. 그렇다면 힙합과 전자음악은 성인가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야 하겠지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머릿속에 트로트라고 하면 어느 정도 고정된 이미지가 존재하는 듯하다.

다소 과장된 컬러의 반짝이 옷을 입고 그만큼 과장된 창법으로 뽕끼 넘치는 구슬픈 혹은 흥겨운 멜로디를 불러젖히는,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이미지의 가수들이 부르는 음악 장르. 그런데 그것을 트로트의 전부라고 말하기에는 못내 아쉽다. 마치 아이돌 그룹이 K팝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그 아이돌 음악마저도 수많은 층위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트롯’ 경연대회 속에 갇힌 트로트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조금 더 생각을 넓혀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기서 트로트 이야기를 멈추고 잠시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자. 블루스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 장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컨트리’다. 재즈, 알앤비, 록, 힙합 등 수많은 장르가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로 올라섰지만 그 어느 장르도 컨트리 음악이 가진 긴 생명력과 저변에 비할 바는 아니다. 무려 2000개가 넘는 라디오 방송국이 매일같이 컨트리를 전문적으로 틀고 있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컨트리 스타들이 등장해 장르의 맥을 면면히 잇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젊은 스타들의 등장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교훈이 있다.

바로 컨트리가 끊임없이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흡수하며 진화와 발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알앤비, 포크, 로큰롤, 재즈, 심지어 컨트리와는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힙합까지도 포용하며 컨트리는 사실상 대중음악 전반에 그 DNA를 심어왔다. 21세기 미국 팝 최고의 스타로 불리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컨트리에 기반을 둔 아티스트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뿐인가? 최근의 컨트리는 기존의 보수적이고 마초적인 태도에서 한 발짝 벗어나 여성주의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메시지를 담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한국의 트로트는 어떠한가?

아무리 짧게 잡아도 백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미국 대중음악과 한국 대중음악의 상황을 1대1로 비교하는 건 물론 공정하지 않다. 그래도 시사하는 바는 분명히 있다. 한국의 트로트가 좀 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흐름을 갖기 위해서는 예능 프로그램의 인기에 기댄 스타 중심의 마케팅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트로트 음악계가 K팝 아이돌 음악에 버금가는 ‘우상’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는 점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아이돌 음악의 일방적인 독주를 일정 부분 견제하며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는 것도 나름의 의의라 하겠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트로트는 다음 단계를 위해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트롯’ 오디션 프로그램 관련 논란들이 그 방증이다. 비대해진 예능의 몸집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재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음악 레퍼토리,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부족한 음악 등 당장 보이는 문제점이 여럿 있다. 물론 이것을 한국 트로트의 위기라고 과장하고 싶진 않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지금의 트로트 열풍은 K팝을 벤치마킹한 오디션발 ‘트롯’의 인기에 더 가깝다고 보기 때문이다.

 

장르가 아닌 음악적 DNA 장착해야

생각해 보면 트로트 역시 미국의 컨트리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 핵심에는 한국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유한 흥과 한의 정서, 흔히 ‘뽕기’라고 하는 미학의 요소가 있다. 흥미로운 건 이 뽕기도 트로트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록에도, 발라드에도, K팝 댄스음악에도, 심지어 힙합에도 독특한 한국적 뽕기의 유전자는 존재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특수한 장르인 것 같은 트로트는 가장 활용 범위가 넓은 장르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예측하지 못한 흐름이 펼쳐질 수 있다. 아직은 불명확하지만 로컬 음악으로만 여겨진 트로트가 글로벌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부분이다.

송가인과 임영웅은 미국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홍진영은 미국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영탁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필리핀에도 진출하는 등 트로트의 외연을 넓혀 나가고 있다.

눈을 바깥으로 돌려보면 아시아권이나 유럽에 한국의 트로트와 유사한 음계의 구조와 정서, 심지어는 창법을 가진 음악들이 존재한다. 면밀하게 고민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해 이 같은 보편적 정서를 트로트를 통해 묶어내 ‘트로트 글로벌리티’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까? 하지만 20년 전에 그 누가 K팝이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고 예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그 시대를 예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진지한 음악적인 고민이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당연히 말처럼 쉽진 않은 일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어떤 경우라도 트로트라는 오랜 장르의 맥은 면면히 이어질 것이고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트롯’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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