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기술 패권주의에 진퇴양난 K-반도체…도 지나친 재갈물리기
  • 허인회 기자 (underdog@sisajournal.com)
  • 승인 2023.03.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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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업황 속 족쇄 채울 美 보조금 정책
기술 및 경영 정보 유출 우려 속 전전긍긍
지난해 5월 20일 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 이재용 당시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 20일 취임 후 한국을 첫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도 평택시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을 방문, 이재용 당시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공장을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 정부의 강경 일변도 ‘반도체 정책’에 ‘K-반도체’가 위기를 맞았다. 다운사이클(침체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도체 업계에 떨어진 날벼락이다.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먹이사슬에 한국을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장비, 설비 등 중국에 상당부분 투자한 한국기업들은 난감한 상황이다. 이에 정부와 함께 반도체 중장기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 재고율이 25년10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난 5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월 반도체 재고율은 265.7%을 나타냈다. 1997년 3월(288.7%)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재고율은 제품 출하 대비 재고 비율을 나타내는 지표다. 재고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생산된 물건이 창고에 쌓이고 있다는 뜻이다. 예상보다 재고율이 높게 나오면서 반도체 불황 국면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부진은 우리 경제에도 악영향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월 수출과 무역수지를 보면 세계 경제와 우리 경제 모두 여전히 어려운 모습”이라며 “반도체 경기의 반등 없이는 당분간 수출 회복에 제약이 불가피한, 어려움이 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설상가상 미국의 보조금 정책이 국내 반도체 산업을 긴장하게 하고 있다. 최근 미국 상무부는 10년간 527억 달러(약 68조원)의 재정지원이 담긴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발표했다. 미 정부는 이 기준에 따라 보조금을 신청한 미국 투자 반도체 기업에 390억 달러(약 50조원), 연구개발(R&D) 분야에 132억 달러(약 17조원)를 지원할 계획이다.

문제는 해당 법이 독소조항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예상을 넘는 이익이 나면 미 정부에서 다시 돌려줘야 한다. 보조금을 신청할 때 예상 수익을 제출하도록 하고, 이로부터 일정 기준을 넘어선 수익을 올릴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까지 이익을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반도체 시설 공개도 부대조건으로 내걸었다. “국가안보 프로그램에 집약될 수 있고 실험·전환·생산시설 접근을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을 찾는다”고 명시한 것이다. 첨단기술이 생명인 반도체 업종 특성상 생산설비 공개는 원천기술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

동시에 재무정보도 공개해야 한다. 엄격한 보조금 심사를 명목으로 재무 건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수익성 지표와 예상 현금흐름 전망치 등 상세한 회계장부도 요구한 것이다. 주요 생산 제품과 생산량 등도 제출 대상이다.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은 “어떤 기업에도 백지수표(blank check)는 없다”며 공개한 부대조건을 관철시킬 뜻도 내비쳤다.

핵심 기술과 경영 정보 노출을 우려하는 업계는 당혹스러운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을 빌미로 과도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라며 “인플레이션감축법(IRA)부터 시작해 첨단 산업의 중심을 미국으로 옮겨오려는 의지가 예상보다 강한 느낌”이라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 왼쪽)이 지난해 11월 29일(현지 시각) 미시간주 베이시티의 SK실트론 CSS 공장을 방문, 지안웨이 동(가운데 오른쪽) SK실트론 최고경영자(CEO)의 설명을 듣고 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 왼쪽)이 지난해 11월 29일(현지 시각) 미시간주 베이시티의 SK실트론 CSS 공장을 방문, 지안웨이 동(가운데 오른쪽) SK실트론 최고경영자(CEO)의 설명을 듣고 있다. ⓒAP=연합뉴스

美 싱크탱크도 압박…“정부가 나서서 협의해야”

여기에 미국의 싱크탱크는 탈중국을 압박하고 있다. 외신과 미 경제계 등에 따르면,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미국·네덜란드·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 협상안’ 보고서에서 한국을 언급했다. 보고서는 “한국은 칩 제조의 선두주자이자 규모는 작지만 정교한 제조 장비 생산국”이라며 “미국 주도 글로벌 반도체 가치 사슬의 균열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새로운 수출 통제 협정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으로의 외연 확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공장에서 전체 낸드플래시의 40%를 생산하며,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에서 D램의 50%를 만든다. 미 정부의 추가적인 반도체 전략에서 한국을 압박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K-반도체’를 둘러싸고 예상외의 미 정부의 태도가 확인되자 정부도 바빠졌다. 지난 5일 한·미 간 안보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미국을 출국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은 “경제안보 현안,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비롯해 반도체법들이 경제안보 차원에서 어떤 플러스·마이너스가 있을지 하나하나 짚어볼 생각”이라며 “마이너스를 최소화하고 플러스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도출해볼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산업통상자원부도 미 상무부와 협의에 나설 뜻을 밝혔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6일 “정부와 기업은 이번 반도체 지원법에 대해 우려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가장 우려되는 부분에 대해 “공급업체에 대한 정보나 기업 경영 상황 등 경영의 본질적인 내용에 대한 정보 제출 의무가 있다”며 “기술에 대한 정보도 상당 부분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관련 기업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고 기업이 가장 크게 문제시 하는 부분을 우선 순위에 두고 미국과 협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정부는 오는 7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과 만나 미국 반도체지원법 관련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의 보조금 정책은 개별 기업이 나설 수 없는 사안”이라며 “결국 정부가 나서서 우리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결과를 끌어내야 하는 중요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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