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 없는 SM엔터의 미래를 엿보다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3.28 07:35
  • 호수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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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 부재로 인한 SM의 변화 불가피
기존 관습과 구태의연함 깨부수는 비전 제시해야

1980년대 중반, 당대 최고의 방송 진행자이자 인기 가수였던 이수만은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정작 미국 생활을 통해 배워온 것은 전공인 공학 지식이 아닌 대중음악의 새로운 트렌드였다. 보이밴드 뉴 에디션(New Edition)이 안무를 곁들인 댄스음악으로 10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을 보며, 그는 완벽히 뒤바뀔 새로운 음악시장의 질서를 꿈꿨다.

마이클 잭슨의 등장과 함께 음악시장은 ‘보는’ 음악으로 바뀌고 있었고, 풍요로워진 경제 상황과 휴대용 음악기기 보급을 통해 틴에이저들이 주 음악 청취층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춤과 비주얼을 앞세운 댄스가수가 가요의 미래가 될 것을 확신한 이수만은 미국에서 돌아온 즉시 SM을 설립했고, 춤을 추는 젊은 가수들을 발굴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기 시작했다. 이태원에서 ‘토끼춤’을 추던 현진영이 그렇게 등장했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든 이가 다 아는 K팝의 역사 그 자체가 됐다.

서울 성동구 SM엔터테인먼트 본사 모습 ⓒ연합뉴스

음악시장 질서 바꾼 K팝 산증인

이렇듯 이수만의 비전과 실험은 늘 K팝 산업의 표준기술이 돼왔다. 체계적인 아이돌 훈련생 육성, 외국 작곡가들과의 협업을 통한 송라이팅 캠프 운영 등을 통해 주먹구구식 가요 산업을 ‘시스템’화한 공은 가장 돋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개념이 가능한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에 그는 이미 그것들을 구체화해 정착시켰다는 사실이다. K팝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산업적 노하우로 꼽히는 ‘현지화’ 기술은 이수만에 의해 ‘한류’ 시작 이전부터 구상됐다.

한국의 음악이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넘어 세계적인 주류가 된다는 생각을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시절에 이수만은 이미 다국적 훈련생들을 뽑아 글로벌 아이돌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S.E.S.의 일본 진출이 그렇게 이뤄졌고,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정복한 보아 역시 그 같은 정밀한 ‘기획’의 산물이었다.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2차 산업혁명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한 음악 제작과 세계화 전략은 가요가 K팝으로 거듭나는 혁신의 요체가 되었다. 이수만은 그것을 가리켜 ‘문화기술’이라 불렀다.

SM 창업자를 넘어 K팝 혁명을 가능케 한 ‘문화기술’의 주창자인 이수만이 결국 SM과 결별했다. 하이브와 카카오라는 미디어 공룡들의 가세로 달아올랐던 SM 인수전은 일단 주체들이 일정 부분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됐지만, 이수만과 SM의 갈등에 이은 결별이 향후 SM을, 나아가 K팝 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료한 그림이 얻어지지 않았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이수만의 지분을 둘러싼 경영권 싸움이 핵심이었으나 그간 SM의 행보를 조금이라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누가 최대주주가 되고 경영권을 갖는가 하는 것 이상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K팝을 산업이 아닌 음악으로 인식했을 때, 이수만의 부재는 SM이라는 기획물의 총감독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이수만은 사업가이기 이전에 영민한 음악 프로듀서이며 그의 철두철미하고 꼼꼼한, 때로는 대단히 독선적인 프로듀싱 방식은 라이크기획이라는 그의 외주 프로덕션을 통해 SM의 음악 스타일을 수십 년째 지배해 왔다.

표면적으로만 봤을 때 변화의 조짐은 이미 감지되기 시작하고 있다. SM에서 최근 내놓은 2장의 앨범, 샤이니의 멤버 ‘온유’와 엑소의 멤버 ‘카이’의 솔로작에는 공히 이수만의 이름이 빠져 있다. 늘 앨범 크레디트 최상단에 자리했던 총괄프로듀서 이수만의 부재만으로 파격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이것이 당장 어떤 변화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냈는지 판단하기에는 조금 이르다. 개인의 개성이 조금 더 도드라지지만 솔로 프로젝트들이기도 하거니와 최근의 국면을 의식한 일종의 ‘시위’적인 성격도 있을 거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SM이 프로듀서 이수만의 지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실질적인 변화는 그들의 주력 그룹인 에스파와 NCT를 통해 포착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콘셉트와 음악, 그리고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IT 기술까지 SM스러움의 집약체라고 말할 수 있는 에스파의 후속작이나 그들의 향후 행보에서 그 변화는 좀 더 뚜렷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수만의 부재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만들어질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변화가 SM이라는 기업이나 K팝 산업의 본질을 뒤바꿀 만큼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일견 나이브한 분석이다. 이수만이 제시한 K팝의 비전들은 이미 수많은 다른 기획사에 의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계승돼 있고, 이수만 개인의 취향이라고 여겨져온 사운드나 편곡의 방향성들은 이미 큰 틀에서 변화가 불가한 SM의 브랜드 정체성이 돼있다.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그 어느 기획사보다 높고 올드팬을 다수 보유한 SM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 부분에서 당장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거라 보기는 어렵다.

 

당장 놀라운 변화보다 디테일 달라질 것

오히려 변화는 사람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디테일에서 조금 더 빨리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동안 팬들에게서 비판받아 왔던 이수만-유영진 프로듀서 콤비의 취향들이 젊은 프로듀서들의 그것으로 대체될 것으로 보이면서 이제 시장의 음악 트렌드를 리드하고 있는 빅히트, 어도어 등 하이브 산하 레이블의 현대적인 감각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을지를 보는 것도 음악팬으로서 쏠쏠한 재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수만의 부재가 SM에 완전히 긍정적인 효과만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을 받아오긴 했지만 이수만은 스스로의 판단에 대해 확신과 고유한 비전을 앞세워 일을 수행해온 프로듀서다.

스티브 잡스 이후의 애플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이수만이 갖고 있는 비전의 유효함을 떠나 그의 부재를 단순 재능의 총합만으로 채울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다른 각도에서는 제왕적 프로듀서 체제의 해체가 갖는 불가피한 후과라 말할 수 있다. 미국과 같은 선진 A&R 시스템이 아직 채 자리 잡지 못한 K팝 시장에서 이수만, 방시혁, 박진영 같은 뮤지션 출신 창업자들의 비전을 뛰어넘거나 기존 패러다임을 깨부순 제작자는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는 뉴진스를 만들어낸 어도어의 민희진 프로듀서뿐이다. 기존의 신에서 성장해 그 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본질적으로 새로움을 제시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해 준다. SM이 얼마 전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며 3.0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 구상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위험요소의 제거를 넘어 기존 관습과 구태의연함을 깨부수는 비전의 혁신이 돼야 할 것이다. 

이수만이 제작한 SM 히트곡 베스트5

현진영 《흐린 기억 속의 그대》(1992)
‘토끼춤을 추는 가수를 발굴하면 가요계를 뒤흔들 수 있을 것이다’는 이수만의 생각은 들어맞았고, 현진영은 힙합을 앞세운 K팝 댄스가수의 효시가 됐다. 이수만과 현진영은 “현진영 came back, boys”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곡을 통해 힙합의 최신 트렌드를 모두 가져와 맞불을 놓았고, 탈춤을 응용한 ‘엉거주춤’은 K팝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레퍼토리가 됐다.

S.E.S 《Dreams Come True》(1998)
빠르게 변해 가는 음악 트렌드와 양산형 음악 제작 시스템에 대응하기 위해 이수만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는 선진 음악 시스템을 연구한 후 상대적으로 저렴한 외국 작곡가들의 곡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들을 통해 ‘송캠프’ 시스템을 구축했다. 《Dreams Come True》를 시작으로 스웨덴을 위시한 스칸디나비아 작곡가의 대거 유입이 이루어졌고, 이는 K팝 세계화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소녀시대 《Gee》(2007)
5인조가 대세였던 K팝 신에서 이수만은 ‘다인원’ 그룹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를 들고나왔고, 9인조 걸그룹 소녀시대는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매력과 개성을 한 그룹이 전부 보유한 듯한 이 새로운 접근법에 외신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소녀시대는 누구라도 반드시 좋아하는 맛이 들어있는 캔디상자에 비유되곤 했다. 박력과 섹시함을 두루 갖춘 이들은 그대로 현대적 K팝 걸그룹의 모범이 됐다.

슈퍼주니어 《Sorry Sorry》(2009)
후크송이라는 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빠르게 핵심만을 전달해야 하는 뉴 미디어 시대의 K팝은 복잡한 구성이나 뜸을 들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후렴’은 더욱 노골적으로 진해졌다. 반복되는 후크는 반복되는 안무의 흡인력과 그룹의 대중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불러일으켰고, 13인조 보이밴드 슈퍼주니어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K팝 사상 가장 큰 히트곡을 그렇게 만들어냈다.

엑소 《으르렁》(2013)
K팝 역사상 팬덤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마지막 아이돌 히트곡이라고 불러도 과장은 아니다. 오늘날 뉴진스를 키워낸, 당시에 SM의 젊은 아트디렉터였던 민희진의 ‘교복패션’ 콘셉트는 파격적이었고, 외모와 노래 그리고 춤 모든 부분에서 빈틈이 없었던 이 그룹은 글로벌 K팝 시대의 선두주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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