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숙인 대만의 전·현직 두 총통이 각각 美-中으로 간 까닭은?
  • 모종혁 중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9 08:05
  • 호수 17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국 우선이냐, 중국 우선이냐’의 행보…차기 대선 위한 여론 형성용 ‘결투 방문’ 성격

4월3일(현지시간)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 사무실은 “매카시 의장이 4월5일 대만 총통과 만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9박10일 일정으로 중미를 순방 중인 차이잉원 총통이 귀국길에 미국 권력 서열 3위인 매카시 하원의장과 회동하는 사실을 공식 확인한 것이다. 차이 총통은 3월29일 먼저 미국 뉴욕을 찾았다. 허드슨연구소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했고, 30일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하킴 제프리스 대표와 회견했다. LA에선 공화당 소속 매카시 의장을 만나면서, 미국 여야 하원 최고지도자와 모두 회동하게 됐다.

같은 날 중국 내륙 직할시인 충칭에서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이 위안자쥔 중국공산당 충칭시 당서기와 회담했다. 마 전 총통은 위안 당서기에게 양안 간 교류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충칭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중국의 임시수도였다. 마 전 총통의 부모는 충칭에 소재한 중앙정치학교를 같이 다녔고, 1944년 충칭에서 결혼했다. 당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제2차 국공합작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3월27일부터 4월7일까지 중국을 찾은 마 전 총통은 내륙의 마지막 방문 도시로 충칭을 선택했다.

마잉주 전 대만 총통(왼쪽)과 쑹타오 중국 공산당 중앙대만판공실 주임 ⓒ
마잉주 전 대만 총통(왼쪽)과 쑹타오 중국 공산당 중앙대만판공실 주임 ⓒ연합뉴스

같은 날 미국-중국 권력자 따로 만나

마 전 총통은 2008~16년 12·13대 총통을 역임했다. 그 뒤를 이어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했고 2020년 연임에 성공했다. 차이 총통은 2024년 5월 퇴임하므로 임기가 1년1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내년 1월에 제16대 대만 총통 선거가 치러진다. 각각 국민당과 민주진보당(민진당) 소속인 두 사람은 2012년 총통 선거에서 붙은 적이 있다. 당시 마 전 총통은 51.6%의 득표율로 차이 총통(45.6%)에게 승리했다. 하지만 차이 총통은 2016년 총통 선거에서 56.1%를 득표해 마 전 총통의 후계자로 31%를 얻는 데 그친 주리룬에게 압승했다.

최근 한국에선 국민당은 친중, 민진당은 친미의 일방적 성향으로 인식되지만, 두 정당의 기본 외교 방향은 모두 친미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입장 차이가 크다. 국민당은 1912년 중화민국의 건국과 궤적을 함께한 정당이다. 창당 주역은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인 쑨원이다. 1919년 중국에서 창당했고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해서 성장했다. 비록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옮겼지만, 오랫동안 대륙 복귀를 내세울 만큼 중화민국에 대한 정체성이 강하다. 과거에는 당원 대부분도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이었다.

민진당은 대만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1986년 진보주의와 대만 민족주의라는 이념을 앞세워 창당했다. 당원 대다수는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성인이다. 실제로 민진당은 중국인과 다른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다. 일각에선 국명을 중화민국에서 대만공화국으로 바꾸려 했다. 이런 움직임은 민진당 출신 첫 총통인 천수이볜이 표면화시켰다. 

천 전 총통은 2004년 연임에 성공했으나 2006년부터 자신과 가족이 각종 부정부패 의혹에 시달렸다. 이에 지지자들을 결집하고자 대만공화국 개칭 문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몇몇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천 전 총통의 지지율이 급락해 흐지부지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 2008년 총통 선거에서 마잉주 전 총통은 58.4%의 득표율로 41.4%를 얻은 셰창팅 민진당 후보에게 승리했다. 같은 해 민진당은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그런 대만의 정치 구도를 바꾼 것은 모순적이게도 중국이었다. 2014년 홍콩에서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중국이 홍콩 정부의 수반인 행정장관을 2017년부터 직접선거를 통해 뽑는다는 약속을 뒤엎으면서 촉발됐다.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은 사람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이에 분노한 홍콩 학생과 시민은 9월부터 12월까지 투쟁에 나섰지만, 홍콩 정부는 경찰을 앞세워 강경 진압했다. 무엇보다 중국은 시위대를 ‘비애국자’로 매도하면서 배후 조종했다. 이런 과정을 홍콩 옆에 사는 대만인들이 목도했다.

당시 대만은 마잉주 전 총통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마 전 총통은 집권 직후 중국에 자유무역협정(FTA)을 제안했다. 그래서 2010년 협상과 비준을 거쳐 2011년 양안경제협력구조협의(ECFA)가 발효됐다. 2014년에는 한발 더 나아가 무역서비스협정을 맺었다. 그 시기에 대만인들은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무참하게 짓밟히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런 중국 당국이 하는 약속이 과연 미래에 지켜질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났다. 하지만 마 전 총통의 중국 밀착엔 브레이크가 없었다. 2015년 11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다.

국공내전으로 분단된 지 66년 만에 이뤄진 중화민국과 중국 정상 간 만남이었다. 당시 회담에 대해 대만 내에서는 2016년 1월 총통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중국의 획책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 전 총통의 지지율엔 큰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중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그 결과가 차이 총통의 승리였다. 같이 치러진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민진당이 대승해 사상 최초로 입법원을 장악했다. 사실 마 전 총통은 뉴욕대에서 석사, 하버드대에서 박사를 마친 미국통이다. 젊은 시절부터 대만 최고지도자의 통역을 맡을 만큼 영어에 굉장히 능통하다.

마 전 총통이 재임 내내 중국과 밀착한 까닭은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의 낙수효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2012년 총통 선거에서는 그 성과를 톡톡히 봐 연임에 성공했다. 하지만 홍콩 민주화 시위 이후 대만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 전 총통은 여전히 중국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반해 차이 총통은 중국과의 관계에 선을 확실히 그었다. 경제와 무역은 협력하지만 대만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이번에 차이 총통이 미국을, 마 전 총통이 중국을 서로 겨루듯 방문한 것은 두 총통과 그들이 속한 정당의 정치적 성향에서 비롯됐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4월5일(현지시간)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과 회동을 가졌다. ⓒ연합뉴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4월5일(현지시간) 케빈 매카시 미국 하원의장과 회동을 가졌다. ⓒ연합뉴스

대만의 정체성과 독립성 두고 확연한 차이

두 총통은 왜 이 시기에 미국과 중국으로 ‘결투 방문’에 나선 것일까. 내년 총통 선거를 겨냥해 유권자들에게 소속 정당의 지향성을 확고히 알려 여론을 유리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다. 여당인 민진당은 라이칭더 주석이 압도적인 지지율로 총통 후보가 될 가능성이 크다. 라이칭더는 대만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또 하버드대에서 4년 동안 수학한 미국통이다. 그에 반해 국민당은 궈타이밍 폭스콘 창업자, 허우유이 신베이 시장, 장완안 타이베이 시장 등이 거론되지만 아직 뚜렷한 주자가 떠오르지 않고 있다.

최근 대만의 민심은 요동치고 있다. 2월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당 지지율은 27.1%로, 2019년 7월 이래 가장 높아 26.9%인 민진당을 앞섰다. 비록 라이칭더가 지지율에서 야당 경쟁자들을 12~17%포인트 앞섰지만, 아직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않았거나 모른다는 응답자가 20%에 달했다. 특히 응답자의 61.1%는 “미국, 중국 모두와 잘 지내야 한다”고 했고, 22.8%만 “오직 미국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답했다. 이런 와중에 차이 총통은 대만의 미래를 위해 미국과 더욱 가깝게 지내고, 마 전 총통은 중국과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