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양태 최근 10년 사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임명묵의 MZ학 개론]
  • 임명묵 작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09 12:05
  • 호수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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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세상 속 또 다른 폭력은 ‘감지’ 더 어려워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소재로 한 드라마 《더 글로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와중에 사회적 유명 인사들의 학교폭력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다시 한번 ‘교실의 정치’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현재까지는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다가 아들의 학교폭력 문제로 낙마한 정순신, 《불타는 트롯맨》 출연자였던 황영웅, 심지어 《더 글로리》 PD까지 주로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학교폭력 미투’의 대상이 되면서 심판을 받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아예 없다가 갑작스럽게 대두된 것은 아니다. 2021년에는 인기 걸그룹 (여자)아이들의 전 멤버 서수진이나 2022년의 신인이었던 걸그룹 르세라핌의 멤버 김가람은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폭로로 인해 그룹을 탈퇴했다.

이처럼 ‘다들 잊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10대 시절의 일들이 다시 불거지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이유로는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던 학교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근래 들어 굉장히 예민해진 것을 들 수 있다. 필자는 2011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당시 대구의 한 중학생이 끔찍한 괴롭힘 끝에 자살한 사건을 계기로 학교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학교 현장에서부터 크게 변하는 순간을 목도했다. 이후 일선 학교에는 학교폭력위원회가 설치되고, 학교폭력은 단순히 ‘애들 싸움’ 정도로 치부되는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의 시급한 개입이 필요한 사회문제로 인식되게 되었다.

ⓒ연합뉴스·넷플릭스 제공
2022년 12월28일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열린 ‘학교폭력 예방 및 대응정책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기조강연 자료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학폭 고발’로 학교폭력을 끊어낼 수 있을까

두 번째 요인은 역시 청년 세대의 문화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변수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보급에 있다. 이제는 모두가 1인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 행동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는 홀로 마음속으로 삭여야만 했던 일이 이제는 얼마든지 ‘복수’가 가능해진 일로 바뀐 것이다. 이런 미디어 환경 속에서는, 적어도 대중의 시선이 커리어와 직결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혹은 인플루언서와 셀럽이 순식간에 불이 붙은 여론의 향방에 몹시 취약하게 된다. 게다가 하나의 성공적 복수담은 다른 피해자들의 복수 의지를 자극하면서 폭로는 연쇄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연속적인 학교폭력 고발은 앞으로의 세대, 특히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당연하게도 학교폭력이 사회적인 고발 열풍으로 근절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는 매우 어렵다. 첫째, 학교폭력을 온라인상에 고발해 여론을 조성하고 가해자의 커리어에 타격을 입히는 방법론은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는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학교폭력 사례에는 유효하지 않다. 사실 온라인상에서 학교폭력 고발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여론을 만들어주는 다수 대중은 학교폭력 자체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집단적으로 행하는 ‘도덕적 린치’ 행위 자체에 몰입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또 등장한다. 모든 학교폭력 고발이 진실의 차원에서 제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1년 K팝에서 학교폭력 고발이 먼저 있었을 때, 몇몇 고발은 근거가 아예 없는 것을 넘어 애초에 허위로 진행되기도 했었다. 온라인상의 허위 고발은 고발자의 악의와 대중의 성급한 정의감이 통제되지 않는 기세로 불이 붙어 억울한 피고발자에게 크나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이런 허위 고발들은 장기적으로는 고발 자체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원래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문제의식이나 도덕 감각 자체를 무디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그래도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적어도 대중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서라도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이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순기능이 있지 않을까?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다. 교육청과 일선 학교에서는 학교폭력 이슈가 계속 불거질수록 관련 대책을 논의하고 더욱 적극적인 조치를 모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딜레마가 존재한다. 바로 학교폭력의 양태가 10년 사이에 급격하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 그다지 심각한 사안으로 취급되지 않던 시절에 남중과 남고를 나온 필자에게 학교폭력이란 기본적으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폭력이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해지면서 학생 간 신체적 폭력을 적발하고 해결하는 데는 큰 진전이 있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10년, 15년, 20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학부모와 일선 교사들의 노력을 통해 정말 엄청난 발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폭력성은 신체적 폭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어적 폭력, 사회적 관계를 활용한 교묘한 폭력은 때로 신체적 폭력 이상으로 인간에게 큰 상처를 입힌다. 게다가 스마트폰이 확산되고 의사소통의 절대량과 시간이 폭증하면서,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언어적 폭력, 사회적 폭력 등 비신체적 폭력에 민감하게 노출된 상태다. 이러한 폭력은 적발하기도 매우 어렵고, 어느 수준을 학교폭력으로 간주하고 어느 수준을 ‘으레 있는 일’로 간주할지 구분하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어른들의 개입은 어디까지여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학교폭력을 향한 불붙는 여론이 학생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마찰을 언어적, 사회적 폭력이라는 이유로 철저히 통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을까봐 다소 우려스럽다.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가 심각한 학교폭력을 별거 아닌 문제로 넘기기도 했지만, 어쨌든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것’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10대 시절에 학교는 성인이 되어 마주하게 될 다양한 갈등과 마찰을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로서도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어른이 개입하지 않는 사회화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회 속 독립적 개인으로 자라날 준비를 한다. 상처를 입더라도 스스로 치유하며 성장하기도 한다. 

만약 당장의 학교폭력을 모두 근절하겠다고, 이 모든 갈등과 마찰을 어른이 개입해 해결한다면 10대 시절에 꼭 배우고 넘어가야 할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성인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도 이런 점을 지적하며 아이들의 자율적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미국의 양육 행태가 현재 미국 젊은 세대를 몹시 ‘연약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

딜레마는 여기서 더욱 심화된다. 학교폭력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는 피해자를 구제하고, 학교폭력을 방지해야 하지만, 동시에 어른이 개입해 아이들의 공간을 무균실로 만드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적절한 중간지대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그 중간지대를 합의할 수 있을까? ‘셀럽’의 학교폭력을 두고 전개되는 현재의 논의는 이런 중간지대를 고민하기에는 너무나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느껴져 몹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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