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쓴 이름 버리는 재계, 약일까 독일까 
  • 박창민 기자 (pcm@sisajournal.com)
  • 승인 2023.04.11 07:35
  • 호수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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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현대·SK·한화 등 그룹명이나 계열사 사명 변경 노림수
낡은 기업 이미지 탈피 vs 오히려 기업 인지도 하락

사명(社名)은 회사의 정체성을 담은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적게는 십여 년에서 많게는 수십 년간 사용한 브랜드들이 재계에 적지 않다. 이 사명을 변경하는 일이 최근 재계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면에는 고루하고 낡은 기업 이미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오너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한다.

계열사 인수합병(M&A)부터 회사 분할·합병, 사업 확장 등 방식도 다양하다. 일부는 그룹명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도 나온다. 사명 변경은 수천억원의 비용이 소요되는 만큼,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사명 변경은 오히려 기업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성희 포스코이앤씨 사장이 3월20일 신사명 선포식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로 깃발을 힘차게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한성희 포스코이앤씨 사장이 3월20일 신사명 선포식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로 깃발을 힘차게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영문식 이름 짓기가 대부분

현대중공업그룹은 최근 그룹명을 HD현대로 변경했다. 지난해 12월26일 HD현대는 창립 50주년 비전 선포식에서 ‘HD현대’라는 새 이름을 채택하고, CI(기업 이미지)와 심벌을 변경했다. ‘HD’는 인간이 가진 역동적인 에너지(Human Dynamics)’로 인류의 꿈(Human Dreams)을 실현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 피라미드 형태에서 ‘포워드 마크(Forward Mark)’로 이름 붙여진 심벌은 변화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기업 의지를 상징한다. 

HD현대는 지난 3월 주주총회 시즌에 계열사의 사명도 일제히 변경했다. HD현대의 건설기계부문 계열사 현대건설기계는 HD현대건설기계로, 현대일렉트릭은 HD현대일렉트릭으로 사명을 바꿨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는 그룹 편입 1년 반 만에 사명에서 ‘두산’을 떼고 HD현대인프라코어로 바꿔 달았다. 2019년 설립된 HD현대의 중간지주사 한국조선해양도 4년 만에 HD한국조선해양으로 사명을 탈바꿈하면서, HD현대 계열사들의 정체성이 강화됐다. 

간판을 바꿔단 곳은 HD현대뿐만이 아니다. HL그룹(한라), DL그룹(대림), DB그룹(동부), 한국앤컴퍼니그룹(한국타이어), HMM(현대상선), LF(LG패션)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그룹이 최근 그룹명을 바꿨다. 이전까지 이들 기업은 대부분 한글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룹명을 바꾸면서 대부분 영문 앞자리를 따거나, 영문식으로 대부분 교체됐다. 글로벌 시장 진출과 신사업 확장에 대한 의지를 반영해 그룹명을 바꾼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대기업들의 계열사 사명 교체 열풍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SK그룹은 재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계열사 사명을 교체하는 그룹으로 꼽힌다. 올해 SK그룹은 석유화학사업을 담당하는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사업 자회사 SK루브리컨츠의 사명을 SK엔무브로 변경했다. 엔무브는 더 깨끗하고(Environmental) 행복한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Movement)을 만들어가는 기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또 SKC미래소재와 자회사인 SKC하이테크앤마케팅은 각각 SK마이크로웍스, SK마이크로웍스솔루션즈로 바꿨다. SKC의 반도체 소재 부품 사업 투자사 SKC솔믹스는 SK엔펄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한화그룹도 계열사들의 간판을 잇달아 새로 달았다. 우선 영상보안 전문기업인 한화테크윈의 사명을 이달부터 한화비전으로 바꿨다. 한화에너지의 자회사 에스아이티는 사명이 한화컨버저스로 교체됐다. 한화그룹은 현재 기업결합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새로운 사명으로 한화오션을 염두해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그룹도 올해 주총을 계기로 계열사 사명을 손봤다. 먼저 그룹 내 2차전지 소재 사업을 담당하는 포스코케미칼은 새로운 사명인 포스코퓨처엠으로 재탄생했다. 미래와 소재, 변화, 매니저의 첫 글자인 ‘M’을 결합해 미래소재 기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포스코건설은 내년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포스코건설에서 포스코이앤씨(POSCO E&C)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앤씨(E&C)는 에코 앤 챌린지(Eco & Challenge)로, 친환경 미래사회 건설의 의미인 에코(Eco)와 도전을 상징하는 챌린지(Challenge)의 뜻을 담고 있다.

한화그룹에 인수된 대우조선해양의 새로운 사명으로 ‘한화오션’이 거론되고 있다. ⓒ연합뉴스
한화그룹에 인수된 대우조선해양의 새로운 사명으로 ‘한화오션’이 거론되고 있다. ⓒ연합뉴스

미래사업 및 글로벌 시장 목표 의미 담아

주목되는 사실은 새롭게 교체된 이들 회사의 사명이 모두 친환경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의도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기업 이름으로 에너지·화학 등을 쓰게 되면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기 힘들다”며 “과거에는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사회적 가치와 맞지 않을 수 있고, 환경에 피해를 주는 기업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같은 기업들의 전격적인 ‘리브랜딩(rebranding)’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기업의 간판을 바꾸는 리브랜딩은 회사의 외양을 넘어 운명까지 좌우할 중요 마케팅 수단이다. 신규 사명엔 기업의 새 정체성이 담긴다. 타깃 확장과 경영 방향성을 새로 제시하기 위한 목적이다. 낡은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경영 쇄신과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이 같은 사명 교체는 기업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해외 사례를 보자. 던킨도너츠는 대표적인 사명 변경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도넛의 인기가 식어가고 다른 식음료 프랜차이즈와의 경쟁에서도 밀려나기 시작하자 사명에서 도넛을 과감히 떼고 ‘던킨’으로 바꿨다. 던킨은 매장에 카페 인테리어를 접목하고 커피 메뉴를 늘림으로써 다시 매출이 반등했다. 또한 뉴던킨 프로젝트로 품질 향상과 생산시설 재편에 착수하는 등 성공적인 브랜드 변화를 가져왔다. 1991년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이 KFC로, 애플 컴퓨터가 2007년 컴퓨터를 빼고 애플로 리브랜딩한 것도 사업 확장을 겨냥한 좋은 시도로 평가된다.

하지만 사명 교체에 대한 여러 우려도 존재한다. 기업들은 이미지 쇄신, 사업 영역 변화, 위기 탈출 등 다양한 목적으로 리브랜딩에 나서지만, 언제나 성공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사명 변경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로고와 간판부터 사내에서 사용하는 종이봉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교체해야 하는 탓이다. 기존 인지도 상실과 새로운 사명 홍보 등에 따른 비용도 감안해야 한다. 

실례로 2018년 ING생명이 현재의 오렌지라이프로 사명을 변경할 때 책정한 리브랜딩 비용이 215억원이었다. BGF리테일은 2012년 훼미리마트를 CU로 변경하면서 전국 점포의 간판과 인테리어 리모델링에 약 500억원을 사용했다. 2005년 그룹 로고를 교체한 SK가 SK텔레콤 대리점과 SK주유소의 간판 교체에 들인 비용만 1000억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페이스북의 사명 변경은 대표적 실패 사례

아울러 기업의 인지도가 하락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막연한 영문식 사명과 주력사업이 사명에 드러나지 않아 무슨 회사인지 헷갈린다는 것이다. 최근 사명이 새롭게 바뀐 한 기업의 관계자는 “전에는 어딜 가든 명함만 내밀면 어떤 회사인지 누구나 알았다. 하지만 회사명이 바뀌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뭐 하는 회사인지 물어본다”면서 “매번 사명이 바뀌었다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하는 게 불편하긴 하다”고 말했다. 

특히 페이스북의 사명 변경은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페이스북은 2021년 ‘메타’로 사명을 바꿨다. 가상 메타버스 사업을 키우겠다는 비전을 담았지만 인지도를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페이스북 브랜드 가치만 떨어뜨렸다는 지적을 받았다. 블랙베리도 스마트폰 사업에서 브랜드 가치를 회복하겠다며 사명 ‘리서치인모션’을 버리고 블랙베리로 간판을 바꿨다. 하지만 ‘보여주기식’ 사명 변경에 그치며 결국 스마트폰 사업 중단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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