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브가 4세대 걸그룹 대전에서 살아남는 법
  • 김영대 음악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4.22 11:05
  • 호수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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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그룹=여성팬, 걸그룹=남성팬 도식 깬 K걸그룹의 도전

아이브(IVE)의 신곡 《I AM》은 여러 면에서 이 시대 K팝 걸그룹 음악의 모범처럼 느껴지는 곡이다. 한때 유행했던 ‘후크송’만큼 노골적인 건 아니지만, 청자를 즉각적으로 끌어들여 몰입시킬 수 있는 반복적이고 중독적인 후렴구. 테마부에 대한 암시를 통해 신속하게 도입부로 이어지는 센스. 조금의 머뭇거림 없이 절정까지 치고 나가는 간결한 전개. 정상에 선 K팝 그룹만이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자신감이 느껴진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하더니 “1, 2, 3 Fly up”으로 폭발시켜 마지막을 한 번 더 확실하게 휘어잡는 노림수 역시 K팝답다. 지난해 최고의 인기곡 중 하나였던 그들의 《After Like》가 떠오르는 복고적인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더해진 다분히 ‘한국적인' 선율이 주는 호소력은 현재진행형인 4세대 걸그룹의 격렬한 경쟁 와중에서 아이브가 차별화될 수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이들의 새 앨범 《I’ve IVE》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세가 느껴진다. 이것은 수록곡들에 대한 개별적인 선호와는 무관한 것으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곡들이 드러내는 분명한 방향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뷔 후 짧은 기간 만에 뚜렷한 성장을 이뤄낸 멤버들의 역량, 특히 안유진과 리즈가 이끌고 장원영 등의 멤버가 떠받치는 보컬라인의 매력은 돋보인다. 뮤직비디오와 함께 볼 때 그 매력이 더 쉽게 납득되는 한국 걸그룹들의 당당한 현대적인 여성미 역시 아이브의 음악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첫 정규 앨범이 보여주는 ‘자신감'과 ‘기세'

첫 ‘정규’ 앨범이니만큼 구성의 묘와 멤버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눈에 띈다. 어둡고 강렬한 선언 같은 오프닝 《Blue Blood》로 시작해 팬들에게 보내는 진솔한 메시지가 빛나는 《Shine With Me》로 마무리되는 앨범의 구조는 곡이 아닌 앨범 단위로 감상하는 팬들에게는 각별한 감동을 선사하며, 그 안에 채워진 각기 다른 장르의 곡들을 유기적으로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 가장 매력적인 수록곡들인 《Heroine》과 《Mine》은 각각 안유진, 장원영이 노랫말을 작업했는데, 앨범의 주요 테마인 ‘나’를 각기 다른 관계 속에서 재치있게 풀어냈다. 두 곡 모두 이들의 첫 단독 작사 시도로서는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타이틀곡인 《I AM》을 포함한 앨범 수록곡들의 크레딧을 유심히 살펴보면 작곡에 참여한 이름들에서 이 앨범이 갖는 일관된 경향의 또 다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아이브의 지난 히트곡들에 이어 이번에도 다수의 곡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라이언전’이 있다. 2010년대 이후 수많은 K팝 아이돌 명곡의 탄생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작곡가지만 그의 역할은 단순히 곡의 비트나 선율을 만드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프로듀싱 ’팀'의 리더이자 코디네이터로 ‘송라이팅 캠프’라 불리는 국제적인 작곡 협업 시스템의 리더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플레이어이자 지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그가 작년에 이어 아이브의 앨범을 위해 꾸린 팀의 가장 큰 특징은 노르웨이 작곡가들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K팝을 유심히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낯선 부분이지만 이미 K팝은 지난 20년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 소위 ‘스칸디나비아’ 계열의 작곡가들과 긴밀한 협업을 이어가며 글로벌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들은 최신 트렌드에 민감하면서 K팝이 추구하는 주문형 제작방식에 최적화돼 있고, 아시아 대중이 선호하는 서정적인 선율을 만드는 데 오히려 미국이나 영국 쪽 음악가들보다 돋보인다. 아이브의 음악이 갖고 있는 특유의 심플하면서도 유기적인 선율, 호소력과 중독성도 노르웨이 계열 작곡가들의 전방위적인 참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브의 음악이 인상적인 건 단순히 세련된 사운드의 만듦새나 멜로디의 중독성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브의 음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힘, 그러니까 그들 특유의 당당함과 건강함은 놀랍게도 K팝에서 가장 과소 평가된 요소인 ‘가사’에서 비롯된다.

타이틀곡인 《I AM》의 메시지를 눈여겨보자. “다른 문을 열어 따라갈 필요는 없어 넌 너의 길로 난 나의 길로 / 하루하루마다 색이 달라진 느낌 밝게 빛이 나는 길을 찾아 / I’m on my way 넌 그냥 믿으면 돼 I’m on my way 보이는 그대로야.”

 

내러티브가 녹아있는 아이브의 새 앨범

K팝 최고의 작사가 중 한 명인 베테랑 김이나가 펜을 든 이 노래는 아이브의 새 앨범에서 시종일관 반복되며 재해석되는 ‘나’에 대한 존중과 자기 확신의 메인 테마로서 앨범을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이다.

선공개곡인 《Kitsch》의 주제의식도 유사하다. “달콤한 말, 뒤에 숨긴 너의 의도대로 따라가진 않을 거야 난 똑똑하니까 / 난 절대 끌리지 않는 것에 끌려가지 않아.” 역시 K팝을 대표하는 작사가들인 이스란과 황현이 풀어낸 센스 있는 노래말은 젠지(Gen-Z)라고도 불리는 제트세대들의 삶의 방식과 태도의 지향점을 간결하게 증언한다.

아이브뿐 아니라 최근 4세대라 불리는 걸그룹들의 노래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 같은 내러티브의 특징들이 유독 뚜렷히 발견된다. 지난해 큰 인기를 모았던 르세라핌의 노래 《Antifragile》이라든지 현상에 가까운 인기를 모았던 뉴진스의 《Hype Boy》도 조금씩 방향은 다르지만 여성 화자의 자기 증명 혹은 자기 주도적인 관계에 대한 의지를 ‘걸크러시’적인 퍼포먼스에 담아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트렌드에는 몇 가지 문화적·산업적 배경이 있는데, ‘보이그룹=여성팬, 걸그룹=남성팬’이라는 전형적인 도식이 깨어지면서 막강한 구매력과 주도권을 행사하는 1030 여성팬들의 취향이 걸그룹 제작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이제 K팝 걸그룹들은 막연히 불특정 다수의 남성 청자들을 향한 ‘플러팅’ 대신 동시대를 호흡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여성팬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들이 하고 싶은 혹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가사에 반영해 좀 더 공고한 아티스트-팬의 관계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과정에는 누구보다도 여성들의 생각을 잘 이해하는 여성 작사가들의 역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브의 새 앨범을 보더라도 타이틀곡을 작사한 김이나를 비롯해 서지음, 이스란 등 업계 최고의 작사가들이 서사를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 안유진과 장원영 등 멤버들의 목소리가 더해져 여성과 남성 청자들의 입장에서 모두 공감이 가능한 당당하고 매력적인, 한편으로는 상처받기 쉽지만 그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 주도적이고 강한 여성상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철저히 계산되고 정교하게 고안된 산업적인 전략의 일환이다. 독립적 여성의 서사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대중이 바라는 필연적인 변화를 자연스럽고 매력적으로, 그리고 이 세대 입맛에 맞게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방법론은 글로벌 시장을 겨냥하는 기획사들 고유의 노하우에 달린 문제다. 아이브의 기획사 스타쉽엔터테인먼트와 A&R 팀은 그 자연스럽고 절묘한 지점, 이야기가 너무 앞서 나거나 과잉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트렌디하고 익숙한 사운드에 새로운 깊이를 더해 주는 그 배합의 지점을 아이브의 앨범 《I’ve IVE》를 통해 제법 성공적으로 발견해 내고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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