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친람 않겠다”던 尹의 약속, 결국 말뿐이었다
  • 이원석 기자 (lws@sisajournal.com)
  • 승인 2023.07.10 07:35
  • 호수 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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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수능’ 논란부터 ‘용산 5차관’ 임명까지…취임 1년 넘기면서 오히려 더 강화되는 대통령의 독주

“대통령이 만기친람(萬機親覽·임금이 온갖 정사를 친히 보살핌)해서 모든 걸 좌지우지하지 않고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과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정을 시스템적으로 운영하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10월20일 SNS에 올린 글의 일부다. 갑자기 나온 약속은 아니었다. 그 전날 윤석열 후보는 부산 해운대구 당협을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가 논란이 크게 일었다. 그러자 다음 날 “전두환 정권 군사독재 시절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제 대통령’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전문가적 역량을 발휘했던 걸 상기시키며 대통령이 유능한 인재들을 잘 기용해서 그들이 국민을 위해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라고 해명하며 덧붙인 것이었다.

‘말의 무게’라는 교훈까지 얻어가며 나온 윤 대통령의 후보 시절 이 약속이 대통령이 된 이후 점점 더 빛이 바래고 있다는 비판들이 나온다. 윤 대통령이 온갖 정책의 세부적인 내용까지 세세히 개입하며 만기친람하고 있다는 것. 같은 비판이 취임 초부터 나왔지만, 당시엔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취임 1년이 지난 시점에도 그 경향이 더욱 짙어지는 것에 대해 여권 내 일각에서조차 우려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7월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신임 차관 임명장 수여식에 입장하고 있다. ⓒ
윤석열 대통령이 7월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신임 차관 임명장 수여식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 대통령 한마디에 바뀌는 정책?

윤 대통령의 만기친람은 가장 최근 ‘공정 수능’ 지시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다는 평이 많다. 수능이 200일도 채 남지 않았던 상황에서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사퇴하고, 올해 수능 ‘킬러 문항’ 미출제 등 중대한 변화 및 결정들이 이뤄졌다. 그 과정은 매우 갑작스럽고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는데 신호탄은 윤 대통령이 5월16일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교육 개혁 추진 상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의 문제는 수능 출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발언한 내용이 공개된 이후였다. 이튿날 대학 입시 업무를 담당했던 교육부 대입담당 국장이 경질됐고, 킬러 문항 및 사교육 카르텔에 대한 정부·여권의 대대적인 저격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이 부총리가 윤 대통령으로부터 엄중 경고 및 질타를 받았다는 내용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일각에선 윤 대통령의 즉흥적인 지시 한마디에 사달이 벌어진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으나, 지시가 갑작스러웠던 건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올해 초 윤 대통령이 이 부총리에게 지시했고, 이후 지시사항이 잘 이행되지 않자 후속 조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발점은 윤 대통령의 지시였다는 사실은 그대로라는 지적은 여전하다.

공정 수능 지시 논란에 ‘데자뷔’란 얘기가 나올 정도로 비슷한 장면은 더 있었다. ‘근로시간 개편’과 ‘만 5세 입학’ 문제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6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연장근로시간 한도를 월 단위로 바꾸는 방안(주 최대 92시간 노동 가능)을 발표했다. 이튿날 윤 대통령이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에서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고 선을 그으면서 혼란이 일었다. 장관의 공식 발표를 대통령이 하루 만에 부정한 모양새가 된 것이었다. 이후 올해 3월 노동부는 다시 ‘주 최대 69시간’ 노동안을 발표했는데 이후로도 몇 차례 대통령실과의 엇박자가 일어나면서 힘이 빠졌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세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반도체 세제 지원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기자간담회를 한 지 사흘 만에 윤 대통령은 “세제 지원을 추가 확대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 달라”고 지시했다. 기재부는 나흘 후인 1월3일 ‘반도체 세제 지원 강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슷한 시기 산업통상자원부가 동절기 에너지 바우처의 가구당 평균 지원단가를 7000원 인상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대통령실이 지원단가를 갑절로 더 올리겠다고 정정 발표하기도 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례들만으로도 결과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윤 대통령의 세세한 입김이 전 부처적으로, 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모습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의 국정 철학대로 부처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떨어질 대로 떨어진 각 부처 장관들의 권위라는 지적이 나온다. 언론을 통해 대통령이 장관들을 질타했다는 사실이 그대로 공개되고, 장관들은 ‘대통령이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이라며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장면이 반복된다. 이주호 부총리는 공정 수능 논란에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입시 관련 수사를 한 경험이 있다”며 “저도 전문가지만 (대통령에게) 제가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발언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럴 거면 무엇 하러 장관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시사저널 임준선·연합뉴스
한덕수 국무총리·김대기 비서실장ⓒ시사저널 임준선·연합뉴스

김대기·한덕수가 보이지 않는 까닭

최근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개각을 단행, 장관급에선 통일부 장관과 권익위원장만 지명하고, 차관급에서 11개 부처 13명의 차관을 물갈이하면서 ‘차관 정치’를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체부 2차관에 역도 국가대표였던 장미란 용인대 체육학과 교수가 깜짝 발탁되면서 이목을 끌기도 했으나, 더 눈에 띈 건 대통령실 비서관 5명이 차관에 임명된 것이다.

김오진 관리비서관과 백원국 국토교통비서관이 각각 국토교통부 1·2차관, 박성훈 국정기획비서관이 해양수산부 차관, 임상준 국정과제비서관이 환경부 차관, 조성경 과학기술비서관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이른바 ‘용산 5차관’이라 불리는 이들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부터 윤 대통령과 함께해온 비서관급의 핵심 인물들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차관 지명 날 이들을 불러 오찬을 하면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업무를 처리해 나가면서 약탈적인 이권 카르텔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맞서 싸워 달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례적인 장면이었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러한 인선에 대해 “집권 2년 차를 맞아 개혁 동력도 얻기 위해선 그 부처에 좀 더 대통령의 철학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가서 이끌어줬으면 좋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차관을 통한 윤 대통령 직할 체제’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김대중 정부에서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장관은 허수아비 만들어놓고 차관 자리에 대통령실 사람들을 내보내서 장악해 직거래를 하겠다고 하면 이게 국정이 제대로 되는 건가”라고 꼬집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런 국정 운영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 같다”며 “(최종 책임자인) 장관은 그대로 놔두고 차관을 시켜서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갖다가 반영하라고 하면 장관은 대통령 국정 철학과 별 관계없는 사람처럼 여겨지는 것 아니겠나”라고 직격했다.

김대기 비서실장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정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윤 대통령이 대부분 직접 나서기 때문이란 관측과 일맥상통한다. 김 실장은 ‘역대 대통령 비서실장 중에서도 존재감이 가장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아울러 윤 대통령은 지난해 첫 국무총리로 한 총리를 지명하면서 총리가 인사권 등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책임총리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한 총리의 존재감이나 무게감은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이번 개각에서도 비춰지듯이 인사권에서도 한 총리의 영향력은 사실상 전무했다는 게 중론이다.

과거 보수 정부 청와대(현 대통령실)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시사저널에 “비서실장과 총리는 단순한 참모가 아니다. ‘나는 겸손하다’고 뒤에 숨는다고 잘하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짊어질 책임을 대신 져주고 때로는 대통령에게 진언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게 그 직책의 무게”라면서 “그러나 현재의 비서실장과 국무총리는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혹평했다.

정부 정책뿐만 아니라 사정 정국, 여의도 정치 등에서 대통령이 계속 출몰하는 것도 ‘만기친람’ 비판을 키운다. 최근 정부가 사교육 카르텔은 물론 노조, 시민단체, 전 정부 에너지 사업 등에 대해 전격적으로 조사한 후 부정 사례들을 공개하고 있는데 그 배경에도 대통령의 지시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이 최근 “우리는 반(反)카르텔 정부”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여의도에선 예산 정국, 심지어 전당대회에서도 윤심(尹心·윤 대통령 의중)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온다. 내년 총선 ‘공천 학살’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만기친람 불가피” 반론도

여권에선 윤 대통령이 만기친람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대통령실 사정을 잘 아는 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거대 야당이 입법 독주를 거듭하고 개혁할 과제들은 산적해 있는 현 정국에 대해 윤 대통령은 항상 책임감과 조급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면서 “장관 인사를 못 하는 것도 야당에서 청문회로 발목을 잡고, 그러면 시간이 계속 딜레이되는 것 아닌가. 이런 열악한 상황에선 대통령이 오히려 그립을 강하게 잡고 가는 게 더 효율적이고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 국민의힘 초선 의원은 “국무총리와 장관들 주도로 정부에서 정말 많은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건 그에 비하면 극히 일부”라며 “대중적 관심이 필요하고 반드시 해결돼야 할 주요 과제들에 대해 대통령이 나서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안팎의 경고음은 계속 이어진다. 다선 의원을 지낸 여당 소속 한 중진 정치인은 “그간 역사에서 대통령이 만기친람하면 될 일도 그르쳤다. 윤 대통령은 항상 그 교훈을 기억해야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현재의 상황은 강한 책임감을 가진 윤 대통령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겠으나 장관과 참모들에게 믿고 맡기고, 대통령은 중요한 최종 결정을 하는 역할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윤 대통령의 만기친람형 리더십에 대해 “자수성가형 정치인들에게서 드러나는 독불장군식 리더십”이라고 평가하면서 “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 같은 과감성이 돋보이면서도 늘 신중했다. 윤 대통령에게는 그러한 신중함과 정치인으로서의 면모가 더 필요할 것 같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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