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질서의 판이 바뀌었다…자유주의 부정하는 순간, 진보 설 땅 없어”
  • 김종일·이원석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23.08.27 16:05
  • 호수 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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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안병진 경희대 교수 “지금은 신냉전과 협력의 ‘모순적 국면’”
“尹의 외교안보 노선엔 ‘실사구시’ 빠져…그저 ‘바이든 노선’ 추종”

한·미·일 정상은 8월1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인근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3국 협력의 ‘새 시대’를 선언했다. 한·미·일은 캠프 데이비드 원칙과 정신, 3자 협의 공약의 3개 문건을 통해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와 기술, 공급망까지 포괄하는 연대와 협력에 합의했다. 한미, 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하는 ‘느슨한 3국 협력’이 이번 선언을 계기로 ‘더 공고한 안보협력체’를 지향하기로 한 것이다. 과거 북핵 대응 등 한반도에 머물던 협력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평가다. 준(準)동맹, 인도·태평양 지역의 새 질서, ‘아시아판 나토’ 등 다양한 분석이 제기될 만큼 의미나 파장도 매우 크다. 

가장 주목받는 포인트는 역내의 도전·도발·위협에 대한 3국의 즉각적 협의와 공조를 약속한 3자 협의 공약이다. ‘사실상 준동맹’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아울러 3국 정상은 공동선언에서 ‘중국’을 역내의 규칙 기반 국제 질서를 저해하는 주체로 거명하며,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러시아에 대한 규탄 메시지와 제재 이행에도 한목소리를 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있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3국 협력에 대해 “우리 국민의 위험은 확실하게 줄어들고 기회는 확실하게 커질 것”이라고 했지만, 이런 움직임은 우리와 안보·경제적으로 밀접한 중국의 강한 반발을 부르고 있다. 북·중·러의 밀착과 한·미·일과의 대립구도 격화 역시 그 최전선에 있는 대한민국으로서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두 발을 현실에 딛고 대비하며 대응해야 하는 분야가 바로 외교안보다. ‘안보에는 만에 하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의 항해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어떤 의미와 과제를 갖고 있을까. 냉철한 판단을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고, 차가운 머리로 분석해야 한다. 엄혹하고 급변하는 안보 위기 상황에서 길잡이가 되어줄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래서 시사저널은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를 찾았다. 안 교수는 미국 정치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치는 것은 물론 공적 지식인으로서 이념과 진영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실사구시’를 학문적 좌표로 삼고 있는 안 교수를 8월22일 서울 광화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안병진 경희대 교수 ⓒ시사저널 최준필

“‘돌이킬 수 없는 제도화’란 믿음은 순진한 생각”

한·미·일 정상은 정상회의 후 입을 모아 ‘한·미·일 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우선 3국의 주요 언론은 물론 많은 학자와 전·현직 고위 관료들이 ‘전환적 분기점’이라는 평가를 공통적으로 내놓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 질서 속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물론 대만해협 등에서의 한·미·일 협력과 공조가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졌다는 측면에서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과 일본 입장에서는 어떤가.

“미국의 외교안보 전략에서도 획기적인 진전이다. 미국은 늘 아시아에서 미국이 중심이 돼 연결망을 만드는 ‘바퀴의 중심축과 바큇살(Hub and Spoke)’ 전략을 공고히 하길 원했다. 그 결정적 걸림돌이 원만하지 않은 한일 관계였다. 미국 안보 관계자들은 한일 관계 이야기만 나오면 침묵하거나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오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 문제의 진전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포기 상태였는데, 이번에 제도화라는 성과를 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가 포착됐고, 그 기회를 잡은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정말 꿈의 순간이다. 최근 바이든 대통령이 이렇게 싱글벙글 웃은 적이 없었다. 일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한 한미 대통령이 만들어낸 의외의 결과다. 

“윤석열 대통령의 캐릭터가 강력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결정적 변수는 윤 대통령이었다. 미·일의 주류적 시선으로 보면, 윤 대통령은 이해가 되지 않는 캐릭터다. 총선을 앞두고 상당한 정치 자본을 잃으면서도 강수를 뒀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이슈 등 악재가 겹쳐 총선에서 지면 레임덕이 올 텐데도 윤 대통령이 의지를 보이니 미·일은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라고 판단하고 최대한 제도화하는 길로 갔다.”

이번 선언이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 합의라고 보나.

“다차원적 협의의 제도화를 이뤄냈기 때문에 다양한 방어막을 짜놓은 것은 맞다. 하지만 두 가지 큰 변수가 있다. 다음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다면 이번 합의는 상당히 과거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는 본인도 본인 행동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럭비공 같은 인물이다. 한국 정치도 변수다. 윤석열 정부와 민주당 세력은 지금 외교안보에서 중첩된 합의점이 거의 없다. 한국은 미국처럼 촘촘한 시스템을 갖춘 나라가 아니다. 정권이 교체되면 진폭은 상당히 커질 수 있다. 이런 변수들을 고려하면 ‘돌이킬 수 없는 제도화’라는 믿음은 아직은 순진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8월18일(현지시간) 워싱턴DC 인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공동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연합뉴스

“여야 모두 1970~80년대 습관적 노선 답습”

보수와 진보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저는 현 정부는 물론 진보가 주창하는 외교안보 노선과 가치에도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절대’라는 강한 표현을 쓰는 이유가 있다. 국제 질서와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양측 모두는 과거의 오래된 습관적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2023년 진보는 여전히 탈냉전기 미국 민주당의 1970~80년대 관점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국판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인 김태효 국가안보실 차장이 주도하는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레이건과 공화당의 1980년대 외교안보 관점을 흉내 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다고 보나.

“지금의 세계적 흐름을 ‘신냉전과 협력의 모순적 국면’으로 규정한다. 보수가 현재를 신냉전 구도로 바라보고, 힘에 의한 방식으로만 북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는 다르다. 탈냉전의 행복하던 시절 당시의 해법과 노선만을 견지하는 진보적 관점과도 다르다. 어렵고 이상한 말임을 잘 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하나. 이제 ‘산뜻한 외교노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앞으로 외교안보에선 가치에 기반하면서도 수많은 모순과 위선, 좌충우돌이 필연적이다. 이런 모순 없이 깔끔한 외교안보 노선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서생이나 할 법한 이야기다.”

진보가 답습하고 있는 문제는 뭔가.

“지금 자유주의와 비(非)자유주의 간 심각한 체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객관적 현실이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관념론에 빠지게 된다. 여전히 진보진영에서 주류적 담론으로 제기되는 ‘가치와 이익 사이에서 균형을 잡자’는 식의 모호한 레토릭,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안미경중(安美經中)과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테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 모두는 틀렸다.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도 문제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독재자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중국 시진핑도 상당한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인다. 상황이 바뀌었다. 절대 그래선 안 되겠지만 미·중 간 전면전이 펼쳐져 대만이 중국에 군사적으로 복속됐다고 가정해 봐라. 한국도 중화 체제 흐름에서 살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비자유주의 속성을 갖는 이 질서를 인정하며 살 수 있나. 이미 국민, 특히 젊은 세대는 홍콩 사태 등으로 자유주의와 아닌 것의 차이를 체득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변화된 갈등적 상황에서 우리가 좀 더 자유주의 진영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를 부정하는 순간, 진보는 설 땅이 없어진다.”

그렇다면 지금 보수의 문제는 무엇인가.

“김태효 차장을 중심으로 하는 윤석열 정부의 노선이 자유주의 가치라고 하는 국제 질서에 부응하는 점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예전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판 네오콘으로서 강경 우파 이념에 따라 현실을 재단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하게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서만 행동하고 있다. 미국조차 미국식 ‘전략적 모호성’ 전략을 펼친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메시지를 여전히 쓴다. 그렇게 디리스킹(de-risking, 위험 감소·완화) 원칙을 통해 핵심적 영역을 제외하고는 대중 협력의 면적을 유지한다. 외교는 디테일의 영역인데 현 정부는 이런 협력의 지면들을 축소하고 있다.”

미국에 ‘올인’하는 전략을 비판하는 건가.

“보수의 덕목은 신중함 아닌가.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는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과는 다른 지정학적 위치 속에 다른 가치와 국익을 추구하는 미국과 일본이 늘 우리와 같은 방식과 시기에 자유주의적 가치를 공유할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나. 미국의 억지력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과연 가져도 될까. 아울러 지금의 일본을 자유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나. 기시다가 속한 파벌에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협력의 수위나 균형점 등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수는 지금 진보에서 지적하는 지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플랜B 시나리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의 전략은 그저 ‘바이든 노선’뿐이다. 이건 쉽다. 하지만 현실은 엄청 어렵고 모순적이다. 때로는 미국의 자유주의 가치에 부응하고 때론 넘어서면서도 중국을 끌어안고 이끌고 가야 한다. 한국이 처한 안타까운 지정학적 모순 속에서는 다차원적인 이슈를 다층적으로 풀어가야 하는데 지금 보수에는 그런 모습이 없다.”

 

“다층적인 초당적 시나리오 만들어가야”

우리가 취해야 할 노선은 무엇이라고 보나.

“위성락 전 대사는 현재 우리가 취해야 할 외교적 입장을 시계에 비유한 바 있다. 우리가 12시에 놓여 있는 가운데 미국은 3시 방향, 중국은 9시 방향으로 각각 한국을 잡아당기고 있는데, 변화된 상황에 따라 우리는 대체로 1시나 1시 반 정도로 좌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탁월한 비유다. 100% 동의한다. 이렇게 우리의 외교 좌표를 설정해 두면 예측 가능한 외교를 펼 수 있다. 미국과 중국도 이렇게 되면 우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거꾸로 우리의 외교적 공간과 선택지도 넓어질 수 있다.”

윤 대통령에게 딱 하나만 조언한다면.

“초당적 외교를 펼쳐야 한다는 점이다. 한반도 주변의 위기는 북핵 문제일 수도, 대만 이슈일 수도 있다. 상황에 맞게 대응 수위도 달라져야 한다. 다층적 시나리오를 진보와 보수를 떠나 초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민주당에도 충분히 협력하고 경청하는 그룹이 있다. 현 정부가 지금의 정책을 좀 더 초당적으로 사전에 야당과 더 소통했다면 국민적 정책 수용성도 지금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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