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풀 유니버스’의 시작점 될 《무빙》…좋은 사람이 이기는, 결국은 ‘멜로’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09.05 11:05
  • 호수 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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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플러스 《무빙》이 독창성을 확보하는 방법
영상화된 강풀 웹툰…원작팬과 신규팬도 모두 만족시켜
여세 몰아 《타이밍》 《어게인》 《브릿지》 등도 영상화될지 주목

그러니까, 부위(장르)별로 즐기는 잘 짜인 코스요리 같다. 7회까지는 풋풋한 청춘물로 미소 짓게 하더니, 8~9회에선 이보다 달달할 수 없는 사내 첩보 멜로를 선보이고, 10~11회에서는 로맨스를 하드코어한 장르적 쾌감에 실어 내달린다. 중요한 건 이렇게 다양한 장르가 짬뽕돼 있는데 난삽하거나 흐름이 끊기기는커녕, 서로가 조화와 충돌을 이루며 흥미롭고 새로운 분위기로 변모한다는 것이다. 북한 캐릭터들이 본격 등장하는 남은 회차에서는 ‘피 칠갑 액션’이 아쌀하게 흩뿌려질 예정이라는데, 빨리 음미하고 싶어 공개 시간을 기다리는 게 얼마 만인지. 디즈니+를 통해 공개되고 있는 강풀 원작의 히어로물 《무빙》 이야기다.

한국형 히어로물 《무빙》의 차별성은 초능력이 ‘유전’의 결과물이란 설정에 있다. 후천적으로 초능력을 얻은 할리우드 히어로들은 대개 자신의 신분을 가족에게조차 숨겨야 했고, 돌연변이였던 ‘엑스맨’들은 기이한 능력으로 인해 부모로부터 버림받기 일쑤였다. 그들은 가족으로부터도 완벽하게 타자화됐다. 그러나 《무빙》은 다르다. 《무빙》의 초능력자 부모들은 아이들의 능력이 자신에게서 유전됐다는 것을 알기에 보호하려 하고 책임지려 한다. ‘유전’이란 설정이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를 자연스럽게 잇고,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눈여겨볼 것은 그것이 자식을 옭아매는 요소로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자식은 나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는 과한 우려가 아이의 욕망을 꺾기도 한다.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한 장면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공중부양 능력이 있는 정원고 재학생 봉석(이정하)이 그렇다. 안기부 요원 출신인 엄마 미현(한효주)이 봉석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한국 사회에서 정상성을 벗어난 신체적 특질은 장애로 여겨질 수 있다는 우려, 그 능력을 국가가 착취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이다. 그래서 미현은 아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책가방에 아령을 넣고, 살이 찌도록 매일 고봉밥을 먹인다.

하늘을 날 줄 아는 능력이 어떤 의미인지 자각하기도 전에 그 능력을 억눌러온 봉석은 상처 치유 능력을 지닌 전학생 희수(고윤정)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각성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장 강훈(김도훈)이 엄청난 스피드로 희수를 구하는 모습을 본 후, 봉석은 나는 연습을 하며 원망하듯 엄마에게 말한다.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른들 에피소드로 바통 터치하기 직전인 7화 엔딩을 장식하는 봉석의 이 외침은 《무빙》이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품 안의 자식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힘껏 응원하게 되는 부모의 변화를 따라가리라는 걸 추측하게 한다.

《무빙》이 지닌 또 하나의 차별점은 시대가 하나의 빌런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개인의 특정 능력을 통제하려 할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무빙》에는 마블의 (어벤져스 설계자) 닉 퓨리처럼 세상에 숨은 능력자들을 모으는 안기부 제5차장 민용준(문성근)이 등장한다. 물론 민 차장은 세계 평화라는 대의로 움직인 닉 퓨리와 동기에서부터 크게 갈린다. 민 차장에게 초능력자는 국가 이익을 위해 복무할 소모품일 뿐이다. 불리할 때 인질로 잡을 수 있는 미끼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민 차장은 엄혹한 시대의 의인화다. 그래서인지, 강풀은 이 인물에게 일말의 개인적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무빙》은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을 개인의 삶에 녹여, 슈퍼 히어로물이 범람하는 시장에서 그만의 독창성을 획득한다.

ⓒ시사저널 박정훈
7월20일 서울 용산CGV에서 열린 《무빙》의 Creators Talk에서 강풀 작가가 발언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원작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작가가 각본을 맡았을 때

《무빙》은 강풀이 직접 시나리오를 집필한 첫 번째 작품이다. 그동안 그가 쓴 만화 콘텐츠는 여러 차례 영상화됐다. 그러나 원작만큼의 호평을 얻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강풀 텍스트의 장점을 온전히 살려내지 못한 데 패착이 있었다. 강풀은 캐릭터 소개에 공을 들이는 창작자다. 그러나 영상화 과정에서 캐릭터 서사가 압축되고 납작해지면서 원작의 장점이 희석돼 오곤 했다.

그걸 잘 알고 있어서일까. 《무빙》은 원작의 볼륨을 줄이는 방향으로 영상화됐던 기존 작품들과는 다르다. 강풀은 반대로, 원작에서 하지 못한 이야기와 캐릭터를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강풀의 승부사 기질도 발견된다. (아이들의 서사가 그려지는) 전반부가 (어른들이 본격 등장하는) 후반보다 늘어진다는 이야기는 웹툰에서도 있었던 평가. 그렇다면 웹툰의 스크린 이식 과정에서 손쉽게 선택할 방법은 전반부를 압축하거나, 원작의 구성 순서(현재-과거-현재)를 시간 순으로 재배치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풀은 원작의 시간 순서를 고수한 가운데, 캐릭터 개인사를 더 파고들어 이야기를 넓히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로 인해 초반 서사가 늘어진다는 평가가 새어 나오기도 했지만, 캐릭터 각각이 원작보다 더 빌드업되면서 시청자가 인물들에 더 큰 애정을 품게 되는 효과를 확실하게 얻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 선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 분위기다. 가령, 희수 아빠인 장주원(류승룡) 에피소드. 괴물로 불렸던 조폭 주원이 로맨티스트 헐크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다방 종업원 지희(곽선영)와의 만남은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다. 좁은 모텔방 한편에 놓인 무협지를 발견한 지희에게 주원이 말한다. “무협지는 결국 다 멜로예요. 좋은 사람이 이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며 끝나요.” 이보다 《무빙》을 잘 드러내는 대사가 또 있을까. 외피만 보면, 《무빙》은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과격하고 유혈 낭자하게 싸우는 이야기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결국은, 멜로인 셈이다. 좋은 사람이 이기는.

‘좋은 사람이 이기는’ 것이 《무빙》이 지향하는 것이라면, ‘공감 능력’은 《무빙》의 근간에 흐르는 기조와도 같다. 학교에서 뜻하지 않게 능력을 드러내며 말썽을 일으킨 어린 아들 봉석에게 미현이 말한다.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영웅적인 면모를 과시하는 게 멋진 게 아니라, 내 주변 사람의 마음을 사려 깊게 들여다보고 보듬어주는 것.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온 강풀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생관이기도 할 것이다. 봉석과 희수가 가까워지는 계기에도, 공감 능력이 있다. 봉석과 희수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각자의 숨은 사연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깊어진다. “너 이상하지 않아. 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라고 희수가 말하는 순간, 봉석의 눈에 번지던 따뜻한 동요가 잊히지 않는다.

알려졌다시피, 《무빙》은 강풀의 또 다른 웹툰 《타이밍》 《어게인》 《브릿지》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블의 작품들이 따로 또 같이 전법을 구사하며 세를 불렸듯, 이들 작품 속 인물들도 상호작용을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무빙》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만큼, 나머지 작품들의 영상화는 시간문제가 아닐까 하는 강한 의심. 그렇다면, 가능한 가설. 《어벤져스》가 그랬듯 신체 능력자들(무빙)과 시간 능력자들(타이밍)이 한곳에서 만나는 ‘강풀 유니버스’를 우린 영상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아마 이렇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시작에 《무빙》이 있었노라. 여러모로 《무빙》은 원작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작가와 그런 원작자의 비전을 리스펙하는 감독과 제작자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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