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벌금 내겠다”…외면 받는 직장어린이집
  • 이동혁 인턴기자 (dhl4001@gmail.com)
  • 승인 2023.09.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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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 미이행 사업장 총 27곳
연간 최대 2억원 벌금에 8년째 버티는 기업도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위치한 국공립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만 2~3세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PIXABAY
2022년 말 기준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미이행한 사업장이 27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PIXABAY

“(직장 내)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것보다 벌금 내는 게 더 싸다”

최영준 무신사 최고재무책임자(CFO)의 문제적 발언으로 불 붙은 직장어린이집 제도 실효성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부는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 불이행 시 기업에 부과하는 벌금 기준 조정 등 개선책 마련에 착수했다.

1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미이행한 사업장은 27곳에 달한다. 일부 사업장의 경우 8년 넘게 벌금을 내며 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직장어린이집 의무를 위반한 사업장에는 쿠팡, 코스트코, 마켓컬리 등 대형 유통업체를 포함해 메가스터디와 에듀윌 등 대형 사교육 기업도 포함됐다.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과 코스트코코리아 광명점은 2014년부터 8년째, 한영회계법인과 다스는 2015년부터 7년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현행 영유아보육법,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상시 근로자가 500명 이상이거나 상시 여성 근로자가 300명 이상인 사업장은 직장어린이집을 의무 설치토록 하고 있다. 사업장 여건에 따라 지역 어린이집과 위탁 보육 계약을 맺는 방식도 허용한다.

그러나 상당 수 기업은 사옥 내 어린이집을 짓거나 위탁 보육 계약 방식으로 직원들의 자녀 양육을 지원하는 것보다 ‘벌금’을 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설치 의무를 위반한 사업장은 연간 최대 2억원(1년에 두 차례, 매회 1억원 범위)의 이행강제금을 내야 한다. 작년 12월부터는 영유아보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실태조사에 불응한 기업에 대해서도 최대 1억원의 과태료를 부과하고 있다.

2022년 말 기준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위반한 사업장 목록 ⓒ 시사저널 양선영
2022년 말 기준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위반한 사업장 목록 ⓒ 시사저널 양선영

그러나 이 같은 불이익이 ‘솜방망이 처벌’에 가깝고 ‘돈만 내면 끝’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직장어린이집 설치를 외면하는 기업들의 행태를 지적하며 “직장어린이집 설치 이행률이 4년 연속 90% 이상 유지되고 있지만 일부 배짱 사업장에선 여전히 설치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면서 “정부가 배짱 사업장에 대한 처벌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은 미이행 사유로 ‘보육수요 없음’(10건)을 가장 많이 꼽았다. 논란의 중심에 선 무신사도 직장어린이집 설치 계획을 밝혔지만 ‘수요 부족’ 등을 이유로 결국 백지화 했다.

하지만 업체별 등록된 보육대상 영유아 수는 최대 세 자리 수를 육박한다. 보육대상 영유아 수는 한영회계법인이 376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뒤로 다스(345명),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234명), 이와이컨설팅(160명) 등이 뒤를 이었다. 김효신 노무사는 최근 YTN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사업장에선 소명 사유로 대개 이용 인원 부족을 들지만 이들 대부분이 대규모 사업장”이라면서 “수요 부족이라는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복지부도 제도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 보완과 손질을 검토 중이다. 다만 당장 이행강제금을 상향하는 방안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다른 이행강제금과의 형평성과 해마다 직장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이행하는 기업이 늘고 있는 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행강제금 부과 제도가 첫 도입된 2016년 이전 의무이행률은 2015년 52.9%에 그쳤지만 2017년 81.5%로 급증했고, 지난해에는 91.5%로 나타났다.

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직장어린이집 설치 미이행에 내려지는 이행강제금의 경우 다른 이행강제금에 비해 낮진 않다”면서 “기업과 관련된 사안이다 보니 앞으로 고용복지부와 함께 해당 문제를 신중히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단 복지부는 직장어린이집 설치계획을 백지화 한 무신사 측에 조속히 설치 의무를 이행하도록 행정지도 했다. 파장이 확산하자 결국 무신사는 지난 11일 위탁보육 실시 계획을 발표하고 한문일 대표가 전 직원에 사과 이메일을 보내는 등 진화에 나섰다.

사내 어린이집 운영으로 기업이 져야 할 비용 부담과 함께 보육 및 교육 과정에서 불거지는 여러 문제에 대한 고충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승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으로선 직장어린이집 설치 비용과 책임 소재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며 “최근 어린이집과 관련한 부정적 사건들로 비춰볼 때, 직장어린이집의 경우 모든 일을 기업 이름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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