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세 중국인 마식도(馬識途) “긴장해야 건강 유지… 애들에게 잔소리 말라”
  • 김명호 전 성공회대 교수 (mhkim25@hanmail.net)
  • 승인 2023.09.23 12:05
  • 호수 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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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특별기고] “사천성에 사는 마식도, 곽말약·파금 이후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108세 때 갑골문 관련 저서 출간도…“나이 들수록 유행에 민감해야”

필자의 요청에 따라 중국인 고유명사와 일부 단어를 한자음으로 표기했습니다. [편집자주]

2018년 6월24일 중국 사천성 도서관에서 총 18권 ‘마식도(馬識途·마스투)문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주최 측은 당시 104세 고령의 주인공을 축하하기 위해 88세의 저명 작가 이치(李致·리즈)와 94세의 ‘모순(茅盾)문학상’ 수상자 왕화(王火·왕화)는 물론, 95세 생일을 넘긴 마식도의 동생을 맨 앞줄에 배려했다. 나이를 합치면 400세에 달하는 4명의 노인은 악수와 포옹으로 좌중을 감동시켰다.

참석자들은 편집자 17명을 대표한 편집주간의 보고에 요란한 박수를 보냈다. “산재해 있던 마 선생의 소설, 산문, 회고성 글을 5년간 수집했다. 편집자 일동은 중국 현대사 연구에 훌륭한 자료를 보충했다고 자부한다. 마식도 선생은 곽말약(郭沫若·궈뭐뤄)과 파금(巴金·바진) 선생 이후 전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장수를 기원하는 것 외에는 없다.”

지인 증손자의 결혼식에 참석해 담소하는 마식도(왼쪽)와 그의 10년 후배인 왕화. 2015년 9월 충칭(重慶) ⓒ김명호 제공

“독서 5개년 계획을 세워 무식과 투쟁하라”

이치가 축사를 자청했다. “마 선생은 모두가 추앙하는 혁명가이며 원로 작가다. 바쁜 와중에도 독서와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다 보니 부업이 본업이 되어버렸다. 104세까지 붓을 놓지 않는 것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선생의 저작을 통해 중국 혁명의 역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우리 작가들에게 하나의 계시다.” 왕화는 흥분했다. 기자가 내민 마이크를 뿌리치지 않았다. “정말 기쁘다. 나는 순전히 축하해 주러 왔다. 마 선생은 한적한 생활을 즐길 충분한 자격과 여건을 갖춘 사람이다. 지금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지식과 투쟁하는 이유는 후세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다.”

성대한 행사가 끝나자 마식도가 노인 3명에게 덕담을 했다. 동생을 불렀다. “애들에게, 손자들 앞에서 잔소리하지 마라. 손아랫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효과도 없고 체면만 상한다. 네 100세 잔치는 내가 해주마. 그때까지 건강 유지해라. 사람은 긴장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긴장하려면 투쟁할 상대가 있어야 한다. 없으면 찾아라. 나는 나를 침략한 암세포와 투쟁하다 보니 이 나이가 됐다. 투쟁은 저항이다. 독서 5개년 계획을 세워서 책과 씨름하며 너를 침범한 무식에 저항해라. 부귀는 한 줌의 재나 마찬가지다. 영원히 남는 건 글밖에 없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써라.”

왕화에겐 친근감을 표시했다. “100세 생일날 우리 집에서 같이 차 마시고, 시(詩) 짓고, 붓글씨 쓰고, 노래하고, 케이크 잘라 먹자.” 가장 어린 이치에겐 애정 어린 질책을 했다.

“아직도 손으로 원고 쓴다고 들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당장 컴퓨터 사서 자판 두드려라. 막 누르다 보면 저절로 익혀지고 손가락 운동에도 도움이 된다. 나이 들수록 유행에 민감해야 젊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 옛날 노래만 흥얼거리지 말고 젊은 가수들 노래도 열심히 들어라. 처음엔 어색해도 계속 듣다 보면 익숙해진다. 영화도 화제작은 꼭 보도록 해라. 옷도 우중충한 것들은 쓰레기통에 버려라. 싸구려라도 밝은색 사 입어라. 10년은 젊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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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서예전 준비에 분주한 마식도ⓒ김명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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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식도는 서예전 수입금 전액, 우리 돈 2억원 정도를 사천대학에 기증했다. ⓒ김명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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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 베이징의 전국작가협회 회의에 참석한 마식도 ⓒ김명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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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22일, 왕화의 100번째 생일을 2주 앞두고 마식도(오른쪽)의 집에서 케이크를 자르는 두 노인 ⓒ김명호 제공

사랑하는 여인 향해 “나는 정신적인 포로 상태”

실제로 마식도는 1980년대 중반, 칠십이 넘어서 컴퓨터를 구입했다. 강인한 의지로 2년 만에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마식도는 1915년 사천성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깡촌에서 중학교를 마치자 고향을 뒤로했다. 중경(重慶·충칭)에서 배 타고 장강 3협을 빠져나왔다. 한구(漢口·한커우)에 도착한 후 집에 편지를 보냈다. “이왕이면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에서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다”며 묵고 있는 여관 주소를 알려줬다. 한숨을 한 차례 내쉰 부친은 달이 뜨자 삽 들고 뒷마당으로 갔다. 몇 년간 돼지 팔아 땅속 항아리에 묻어둔 돈을 꺼냈다. 16세 소년 마식도는 부친이 보내준 돈으로 상하이와 베이징을 오가며 두 도시를 저울질했다. 들떠 있는 상하이보다는 고도 베이징이 맘에 들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친구를 따라 베이징사범 강연회에 갔다. 콧수염이 멋있는 노신(魯迅·루쉰)이라는 사람의 연설을 듣고 감격했다. 비슷한 사람이 되겠다고 주먹 불끈 쥐며 이를 악물었다. 1938년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중공(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지하에서 선전활동을 하던 중 학생 시절 알던 여자에게 홀딱 빠졌다. 훗날 회고를 글로 남겼다. “정의 그물에 빠져들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 잘 보이려고 흡연 관리를 자원해 버렸다. 여인은 이틀에 한 개비만 허락했다. 대신 과일과 사탕을 사줬다. 나는 죽을 맛이었지만 이미 정신적인 포로 상태였다. 몰래 피웠다 들키면 나를 외면할 것 같아 꾹 참았다.”

담배 덕에 성공한 마식도의 결혼생활은 짧았다. 부재중 집에 있던 중공 선전유인물이 발견되는 바람에 부인이 투옥됐다. 부인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신분이 폭로된 마식도는 운남성 곤명으로 도망갔다. 신분 세탁을 위해 자타가 공인하는 중국 역사상 최고의 대학 서남연합대학 외국어문학과에 합격했다.

다녀보니 외국 문학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문일다(聞一多·원이둬), 주자청(朱自淸·주즈칭), 유문전(劉文典·류원덴), 진몽가(陳夢家·진몽가) 등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신구(新舊)의 대가들이 운집해 있는 중국문학과로 전과했다. 대학 생활은 자유로웠다. 학생 열 명이 모이면 열 개의 의견이 난무했다. 교수들은 대가다웠다. 단결하라며 나무라지 않았다. 극히 정상이라며 흐뭇해했다. 학생들은 개성 존중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며 교수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마식도는 낮에는 명강의에 심취하고 해가 지면 지하공작에 분주했다. 신중국 수립 후 공을 인정받았다. 건설과 기획 부문의 중요 보직을 거치며 독서와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소설 한 편을 내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원로 작가가 모두 공감하는 질문을 했다. “작품 읽어봤다. 거대한 혁명 기간의 생활을 보는 것 같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사람인지 추측이 불가능하다.”

2020년, 106세를 맞은 마식도는 신간 출간을 앞두고 봉필(封筆)을 선언했다. 젊은 작가가 “마 선생이 허언을 했다”며 만인을 웃겼다. 갑골문에 관한 저술로 2년 전의 허언을 자인했다. 2023년 미모의 여기자가 인터뷰를 마치며 성취를 축하하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성취는 무슨 성취냐. 남는 건 유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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