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 골퍼들의 ‘마지막 비상구’ 되는 아시안투어
  • 안성찬 골프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1.12 13:05
  • 호수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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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골프에 비해 국내 대회 수와 상금 규모 여전히 부족
국내 투어와 유럽투어 사이의 교두보 역할

아시안투어가 한국 남자 프로골퍼들의 ‘비상구’가 될 수 있을까. 아시안투어는 올해 22개 대회로 치러지고 있다. 지난 2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작해 오는 12월3일 타이완 글라스 타이퐁 오픈으로 막을 내린다. 총상금 규모가 3012만 달러(약 393억원)다. 여기에 아시안투어에 속해 있는 한국 대회 3개의 상금을 합치면 41억원이 추가된다. 아시안투어는 그동안 스폰서가 허약해 제대로 된 대회다운 대회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가 지난해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이 합류하면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인터내셔널 시리즈가 7개나 생긴 것이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롯데스카이힐 제주 컨트리클럽에서 인터내셔널 시리즈가 열렸다.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는 구자철 회장이 수장을 맡으면서 ‘쪼그라들었던’ 대회 수와 상금액을 크게 늘리는 데 성공했다. 지난 4년간 공을 들이면서 올해는 22개 대회가 열렸고, 총상금은 230억원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당초 약속했던 게 25개 대회였으나 그중 부득이하게 주최 측 사정으로 3개 창설 대회가 없어진 부분이다. 10월19일 열릴 예정이던 코리안투어 메뉴톡 코스모스 링스 오픈이 취소됐다. 앞서 6월29일부터 열려던 신설 대회는 아예 후원사와 개최 코스 섭외가 성사되지 않아 무산됐고, 9월28일부터 나흘 동안 경기도 안산 아일랜드 컨트리클럽에서 개최하려던 아일랜드 리조트 더 헤븐 오픈은 개막 한 달 전에 취소됐다.

왼쪽부터 김주형, 엄재웅, 왕정훈 ⓒ뉴시스·EPA 연합·KPGA 제공

세계 무대 진출 위해 아시안투어와 병행하는 선수 늘어

남자 골프와 단적으로 비교되는 게 국내 여자 골프의 인기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는 올 시즌 대회가 32개나 되고, 총상금 규모도 311억원이나 된다. 국내 남자대회는 선수층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프로골퍼에게는 골프장이 직장이고, 투어 활동이 직업이다. 프로골프 선수에게는 대회의 상금이 생계와 직결된다. 이 때문에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아시안투어에 눈을 돌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일부 국내 선수는 KPGA투어뿐만 아니라 아시안투어 및 일본프로골프(JGATO)투어를 겸하기도 한다. 엄재웅, 왕정훈 등은 유럽투어인 DP월드투어까지 병행한다. 이처럼 겹치기로 투어를 다니는 이유는 국내 투어와 아시안투어, 그리고 DP월드투어와 아시안투어를 하나로 묶어 대회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선수들이 아시안투어를 넘보는 이유는 당연히 상금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때로는 아시안투어에 미국프로골프(PGA)투어와 DP월드투어에서 활약하는 세계 정상급 프로들이 출전하면서 한국 선수들이 이들과 함께 기량을 겨룰 수 있다는 것도 큰 이점이다. 특히 병행하는 대회에서 우승하면 곧바로 DP월드투어로 직행할 수도 있어 선수들에게는 여간 매력적인 대회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선수가 아시안투어의 ‘오더 오브 메리트 챔피언스’(상금순위 1위)에 오른 것은 현재 PGA투어에서 활약하는 노승열(2009년)과 김주형(2020~21년)뿐이다.

올해 아시안투어 개막전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열린 PIF 사우디 인터내셔널이다. 총상금이 500만 달러나 됐다. 이 대회는 유러피언투어로 열리다가 지난해 아시안투어로 전환해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회다. 지난해 대회는 2월3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인근의 로열 그린스 골프&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됐다. 같은 기간에 PGA투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의 페블비치 골프 링크스에서 AT&T 페블비치 프로암(총상금 870만 달러)이 개최됐다. 놀라운 것은 세계 톱랭커 더스틴 존슨을 비롯해 잰더 쇼플리, 브라이슨 디섐보, 버바 왓슨(이상 미국), 이안 폴터(잉글랜드), 애덤 스콧(호주), 세르히오 가르시아(스페인), 토미 플리트우드(잉글랜드)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PGA투어를 접고 대거 아시안투어에 출전했다는 사실이다.

 

왕정훈·엄재웅, 아시안투어 집중…김주형은 아시아 찍고 미국 진출

아시안투어에 뛰어든 선수들은 고단하고 고달픈 ‘골프 노마드(golf nomade)’를 감수해야 한다. 프랑스어 노마드의 사전적 의미는 유목민이다. 특히 노마드는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진화시켜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을 말한다. 젊은 골프 선수들은 꿈의 무대로 꼽히는 양대 산맥인 PGA투어와 DP월드투어의 전초전으로 아시안투어를 선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징검다리’ 역할로는 최고의 투어인 셈이다. 한국 선수들이 아시아를 순회하며 벌이는 아시안투어에 출전하는 것처럼 외국 선수들도 한국이나 일본에서 열리는 GS칼텍스 매경오픈, 코오롱 한국오픈, 신한동해오픈, 인터내셔널 시리즈 등에 대거 참가한다.

한국 선수 중에는 왕정훈이 ‘노마드’의 원조 격이다. 그는 2012년 중국프로골프(CPGA)투어를 거쳐 2014년 아시안투어에 진출했다. 2016년 5월 하산 2세 트로피에서 우승하며 DP월드투어 챔피언에 이름을 올렸고, 모리셔스 오픈에서 ‘2주 연속’ 우승했다. 그는 신인상을 획득하며 2016년 안병훈과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리우올림픽에 출전하기도 했다. 왕정훈은 2017년 커머셜 뱅크 카타르 마스터스에서 DP월드투어 29개 대회 만에 3승을 올렸다.

비단 왕정훈뿐만이 아니다. 엄재웅을 비롯해 10여 명의 한국 선수가 현재 아시안투어에 집중하고 있다. 10월15일 마카오에서 끝난 SJM 마카오픈에서 만난 엄재웅은 “매주 다른 나라로 이동하면서 경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며 “하지만 체력이 따라주고 기량만 받쳐준다면 아시안투어는 영건 프로골퍼들에게는 미국과 유럽투어에 이어 최고의 꿈의 무대”라고 말했다.

아시안투어에서 준우승을 두 번 한 엄재웅은 아시안투어가 없는 틈을 타 국내에 들어와 2018년 첫 우승 이후 5년 만에 올해 KPGA투어 백송홀딩스 아시아드CC 부산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국내 KPGA투어의 대회 수와 총상금액이 증가하지 않는 한 한국의 남자 프로골퍼들에게 아시안투어는 당분간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 위한 ‘미래의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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