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정쟁에 갇힌 정치, 사람 교체가 답 [유창선의 시시비비]
  • 유창선 시사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1.27 12:00
  • 호수 1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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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중진 험지 출마’ ‘86세대 용퇴’ 거부하는 국회의원들의 무한 욕심
‘한번 국회의원이면 평생 국회의원’ 신조어 나올 판

“저는 제 알량한 정치 인생 연장하면서 서울 가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국민의힘의 대표적 ‘윤핵관’인 장제원 의원이 얼마 전 관광버스 92대가 동원된 산악회 행사에 참여한 지지자들 앞에서 했던 말이다. 그동안 장 의원을 비롯한 국민의힘 영남권 중진 의원들은 인요한 혁신위원장으로부터 ‘험지 출마’ 요구를 받아왔다. “영남에 스타가 있으면 험지에 한번 와서 힘든 걸 도와줘야 한다. 이제는 정치인이 국민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인 위원장의 주문이었다. 그러니 “서울 가지 않겠다”는 장 의원의 말은 인요한 혁신위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험지 출마는 고사하고 오히려 대규모 세 과시를 통해 자신의 지역구 출마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시사저널 박은숙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인요한 혁신위원장이 11월1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면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시사저널 박은숙
ⓒ시사저널 박은숙
2021년 10월18일 이인영 통일부 장관과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국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시사저널 이종현

못 들은 척하는 게 최선이라 판단하는 듯

장 의원뿐만이 아니다. 인 위원장이 당 지도부-중진-친윤계 인사들을 향해 험지 출마 요구를 한 지 어느덧 3주가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요구에 화답해 험지 출마 혹은 불출마 의사를 밝힌 현역 의원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혁신위원회 설치를 주도하고 인 위원장에게 전권을 부여했다던 김기현 대표조차도 묵묵부답이다. 국민의힘 안에서의 이러한 침묵은 인 위원장의 요구에 대한 거부의 의미다. 굳이 나서서 반대하면 혁신에 반대하는 인물로 찍힐 수 있으니, 그냥 못 들은 척하면서 지나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인 듯하다. 그렇다 보니 인요한 혁신위가 만들어지고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혁신안이 맥을 못 추는 상황을 맞고 있는 셈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의 험지 출마설이 대신 나오고 있지만, 그렇게 된다 해도 국민의힘 중진들의 기득권 연장이라는 현실이 덮이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 위원장의 험지 출마론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예 불출마라면 자기를 희생하고 신진들에게 기회를 넘겨주는 결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총선이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갑자기 지역구를 바꿔 낯선 곳에서 출마하는 것은 그냥 의석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 총선에서 타의에 따라 험지 출마를 했던 이혜훈·김용태·정우택 후보 등이 낙선했던 경험은 험지 출마에 대한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진 다선 의원이라 해도 갑자기 무연고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디테일한 어려움을 넘어 자기희생의 통 큰 결단을 내려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게 험지 출마의 힘이다.

당내의 무시 속에서 결국 인 위원장의 험지 출마 요구는 한발 물러서는 분위기다. 김기현 대표는 “당 지도부가 공식 기구와 당내 구성원과 잘 협의해 총선 준비를 하고 당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시스템이 있다. 혁신위도 그 공식 기구 중 하나”라면서 공천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혁신위가 아니라 당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혁신위도 상향식 공천, 엄격한 컷오프, 전략공천 원천 봉쇄 등의 내용이 담긴 ‘4호 혁신안’을 발표했지만 결정권을 당 공천 기구에 넘겼다. 인 위원장의 험지 출마 요구는 결국 대답 없는 메아리, 용두사미로 끝날 위기에 처해 있다.

내려놓을 줄 모르는 모습들은 국민의힘만의 얘기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험지 출마론을 둘러싼 당내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비명계인 이원욱 의원은 이재명 대표가 고향인 경북 안동에 출마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대표는 우리나라 정치에서 대표적인 기득권자 중 한 명”이라며 “3선 의원 험지 출마론이 나오는 것도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솔선을 보여라 이런 거 아니겠느냐”는 주장이다. 범친명계로 분류되는 김두관 의원도 이 대표가 총선 승리를 위해 험지에 출마해야 한다고 거듭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친명계에서는 이 대표 험지 출마론을 일축하며 반박하고 있다. 박찬대 최고위원은 “총선을 진두지휘해야 할 당대표가 고향 안동, 아주 험지에 가서 자기 선거만 하라는 것인가. 현실성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고 반박했다. 당 전략기획위원장인 한병도 의원도 “총선을 이끌 당대표가 경북에 가서 총선을 진두지휘하는 것이 민주당의 총선 승리를 위해 과연 유리하겠냐”며 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일단 이 대표는 현재 지역구인 인천 계양을에 그대로 출마하는 것이 유력한 상태로 보인다. 다만 국민의힘에서 원희룡 장관이 이 대표의 지역구에 험지 출마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어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자신의 시대 끝났음에도 버티는 건 ‘노추’

이 대표의 험지 출마 공방과는 별개로, 큰 선거 때마다 민주당의 쟁점이 되는 것은 ‘86 용퇴론’이다. 민주당 소속인 여선웅 전 청와대 청년소통정책관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송영길 전 대표는 9번, 이인영 의원은 6번 공천을 받았다. 왜 정치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는 “86들이 떠나고 나면 ‘진보 실용주의 민생 정당’이 민주당의 주류가 될 것”이라며 86들의 용퇴를 촉구했다. 큰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민주당에서는 86 용퇴론이 나오곤 했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박지현 공동비대위원장이 86 용퇴론을 제기했다가 오히려 당내에서 고립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누가 뭐라고 한들, 86그룹 정치인들은 반복되는 용퇴론에 맞서 버티며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정당 권력이 되어 왜 이렇게까지 오랜 세월 국회의원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86들의 정치가 이루어놓은 특별한 성과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86들도 이제 60대 나이에 들어섰다. 젊은 시절에 불과 몇 년 동안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훈장을 달고 평생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강산이 몇 번은 바뀌었을 세월이 지났다. 그사이에 시대가 지향하는 정신과 가치도 크게 달라졌다. 진영논리에 갇힌 86들의 생각은 더 이상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나갈 미래지향적 비전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 86들이 만약 22대 총선에도 출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제는 시대의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시선을 피하기 어렵다.

오늘 극단적인 정쟁에만 갇혀 있는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는 결국 사람들이 바뀌어야 개선될 수 있는 문제다. 낡은 사고에 갇혀 있는 정치인들이 평생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하며 정치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진정한 변화는 요원하다. 정치를 오래 했던 사람들이 자리를 내려놓아야 새로운 인물들이 우리 정치를 채울 수 있다. 여야를 불문하고 내려놓을 줄도 양보할 줄도 모르는 국회의원들을 보노라면, ‘한번 국회의원이면 평생 국회의원’이라는 신조어라도 만들어내야 할 판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평생직장이 어디 또 있을까. 그만하면 오래 많이들 했다. 이제 그만하고 후진들에게 역할을 넘겨줘라. 당신들의 시대가 끝났는데도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노추’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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