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GA(한국프로골프협회)의 정권교체? 재벌 총수 구자철 제치고 회장에 오른 ‘평민’ 김원섭
  • 성호준 중앙일보 골프 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10 16:05
  • 호수 1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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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 대의원 대회에서 108대 75로 완승…류진 한경협 회장도 지원
프레지던츠컵 때 토너먼트 디렉터로 활약한 아시아 최고의 골프 커리어

11월23일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대의원 대회에서 일대 반란이 일어났다. 김원섭 풍산그룹 고문이 재선을 노리는 현 회장 구자철 예스코홀딩스 총수에게 승리한 사건이다. 김원섭 당선자는 2024년 1월1일부터 4년 임기로 KPGA 회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전까지 KPGA나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에서 기업 총수가 회장 경선을 치른 적은 없다. 프로골프 회장에 나선 기업 오너들은 추대 형식이 아니라면 아예 사퇴했다. 골프를 좋아하지만, 회장을 안 하면 안 했지 귀족이 평민과 대결하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범LG 가문의 구자철 회장은 이례적으로 완주를 선언해 기업 총수와 기업 총수 보좌역의 대결이라는 흔치 않은 대결 구도가 만들어졌다. 다들 ‘회장님’이 이길 걸로 봤는데 놀랍게도 보좌역이 이겼다. 회장 선거엔 총 201명의 대의원 중 183명이 참석했는데 김원섭 당선자가 59%인 108표를 얻어 완승했다. 구자철 현 회장은 75표를 얻는 데 그쳤다.

일단 구자철 회장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다. 구 회장은 취임 초기 SNS에 여자골프만 후원하는 기업들을 열거하며 “너네 다 죽었어”라고 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KPGA 발전을 위한 충정이라고 여겼으나 이후 SNS로 인한 사건이 너무 많아 분위기가 바뀌었다. 엠바고를 건 사안을 회장이 먼저 자신의 SNS에 발표한 일도 있었다.

경기위원들은 “간부들이 경기위원회에는 와보지도 않더라”라고 불평했고, 인사 관련 구설도 있었으며 스포츠 단체 중 처음으로 파업도 나왔다.

김원섭 후보의 승리에는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와 풍산그룹을 이끄는 류진 회장의 지원도 한몫했다. 류진 회장은 한국 골프계의 대부 격이다. 김원섭 당선자는 “풍산그룹을 통해 100억원을 후원하고 60억원 이상의 스폰서를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냈다.

ⓒ(재)나인밸류스 제공
김원섭 KPGA 회장 당선자 ⓒ(재)나인밸류스 제공

“100억원 후원, 60억원 스폰서 유치” 공약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뒷배가 누구든 KPGA 회원들은 격이 떨어지는 사람을 회장으로 뽑지는 않는다. 김 당선자는 골프업계 경력이 화려하다. 골프계 아시아 최고의 커리어라고 할 만하다. IMG코리아에서 골프 담당 이사로 재직했다. 그때 최경주가 PGA투어에 진출했다.

J골프(현 JTBC골프) 창립 총괄본부장으로 채널 론칭에 역할을 했다. 한국 골프방송 선발주자 SBS골프의 업적은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크다. 그러나 JTBC골프의 역할도 만만치 않다. SBS골프 독점체제에서 홀대받던 KLPGA투어는 경쟁 시스템으로 변하면서 꽃을 피웠다. JTBC골프가 자리 잡지 못했다면 국내 투어의 상금·중계권 등이 답보했을 가능성이 크고, 뛰어난 재목들이 골프계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세리, 최경주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김 당선자도 주역 중 하나다.

김 당선자는 또 2015년 토너먼트 디렉터 겸 상임이사로 인천 송도에서 열린 프레지던츠컵을 성공시켰다. 머리 노랗고 눈이 파란 백인들의 스포츠인 골프에서 굵직한 대회가 비영어권 국가에서 열린 건 처음이었다. 김 당선자는 “한국에서 이 대회가 열릴 수 있겠느냐는 서양 골프계의 의심을 불식시킨 게 큰 자부심”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PGA투어 자문역을 역임했으며 컨설턴트로 현대차 제네시스의 골프 마케팅을 도왔다. 제네시스는 PGA투어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과 제네시스 스코티시 오픈을 여는데 두 대회 모두 알짜 대회다.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은 타이거 우즈를 호스트로 하는 PGA투어 정상급 대회다. 스코티시 오픈은 디 오픈 전주에 열려 PGA투어와 DP월드투어 최고 선수들이 모두 참가한다. 현대차의 럭셔리 브랜드 제네시스는 단기간에 도약했고 그 중심에는 골프 마케팅이 있다. 골프계를 잘 아는 김 당선자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

2016년부터 김 당선자는 골프를 통해 골프도 배우고 인성교육을 하는 ‘더 퍼스트 티(The First Tee)’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데 벌써 1000명 넘는 주니어 선수를 배출했다.

김 당선자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기업은행 간부로 골프와 야구를 좋아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김 당선자는 “1970년대 동대문야구장에서 기업은행 야구팀 경기를 하루 종일 보기도 했다. 윤동균, 배대웅, 박상열, 박영길, 김성근, 김응용 등 당시 야구 스타들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김 당선자는 “LA 다저스타디움은 충격 그 자체였다. 5만6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도 그렇지만 푸른 잔디와 까마득하게 날아가는 홈런 공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20여 년 후 공주에서 온 한국의 젊은이(박찬호)가 하얀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랐을 땐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구자철 예스코홀딩스 회장, 류진 한경협·풍산그룹 회장 ⓒ연합뉴스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미팅 상대방 연구

김 당선자는 1984년 LA올림픽 때는 미 공군 현역 복무 중 특별휴가를 받아 한국 선수 전담 통역을 맡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미 공군으로 용산기지에 근무하며 자원봉사로 보도담당관을 했다.

이후 문화일보 야구 담당 기자, J골프 본부장, 엑스포츠 본부장 등을 거쳤다. J골프 개국 때 함께한 전육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따라 한국프로농구연맹(KBL)에서 총재 특보로도 일했다.

김 당선자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영어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미국에서 이른바 ‘스몰톡’이라는 스포츠 관련 지식은 박사 수준이다. 새벽에 일어나 미팅 상대의 출신지, 선호 팀 등을 파악하고 스포츠 뉴스 등을 챙겨 호감을 얻었다. 미국 스포츠계에 김 당선자의 지인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외부인이 아니라 에이전시, 컨설팅, 미디어, 협회 등 인사이더로 일했다. KPGA는 김 당선자와 함께 PGA투어는 물론 메이저단체, LIV골프와도 교류를 넓힐 것으로 보인다. 김원섭 당선자는 “KPGA는 스타 유출 우려 때문에 선수들이 해외로 나가는 걸 반기지 않았는데 내년부터는 선수가 나갈 수 있게 도와 골프라는 스포츠의 파이를 키울 생각”이라고 했다.

김원섭 KPGA 회장 당선자와 함께 일한 사람들의 평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김원섭 당선자는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한국과 미국의 교육에서 좋은 점을 취했다. 일이 우선이고 정직하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한다. 할 수 없는 건 못 한다고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잘한다. 다양한 스포츠에 전문지식이 깊다. 상황을 창조적으로 타개해 나갈 솔루션을 준비하고 있다.”

김 당선자는 “어릴 적 아버님이 집 앞마당에 희미한 조명의 작은 연습 네트를 만들고 골프 연습을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50년이 흘러 내가 한국 남자프로골프를 맡게 돼 감회가 깊다”고 했다.

물론 김 당선자가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미국에서 자란 배경을 두고 한국 문화와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의 업적은 4년 후 임기가 끝날 때쯤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재력가나 권력자 등 이른바 귀족이 맡았던 KPGA의 수장 자리를 열심히 일하는 평민으로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성호준 중앙일보 골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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