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의 ‘의대 정원 증원 반대’ 투쟁 더 이상 안 통해 [쓴소리 곧은 소리]
  • 박기영 순천대 교수(전 대통령정보과학기술보좌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3.12.22 16:05
  • 호수 178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0년 3273명이었던 의사 정원, 다시 3058명으로 축소돼 20여 년간 동일
정부도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확장 방안을 패키지로 제시해야

자주 가는 동네의원의 접수대 옆에 불편한 포스터가 한 장 붙어있다.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정원 정책을 강력 규탄합니다!!” 또한 지역에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병원을 전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거나 KTX 기차 안에서 병원에 가는 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거의 20년간 의과대학 정원이 논의되는 양상을 보면 “백약이 무효”인 듯해 보인다. 의사협회 회장의 삭발 모습과 수천 명의 의사가 거리에 나와 총궐기를 하고 파업하는 모습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의료 서비스를 결정하는 정책에서 대화는 거부한 채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을 보기가 매우 불편하다.

12월20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단독으로 지역의사제 법안과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 법안을 통과시켰다. 정치권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공공의료, 공공의료기관, 공공의대, 지역의사제, 국립의대 등 여러 단어가 혼란스럽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확충하기 위해 의과대학 정원을 어느 정도로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다.

정부는 국민의 의료 질 향상과 의료 서비스 확충을 위해 일련의 의료 개혁을 추진하면서 2000년 국민의료보험과 직장의료보험을 통합해 국민건강보험을 출범시켰고 의약분업도 실시했다. 또한 동시에 지속적으로 의료인력 양성을 확대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의과대학을 신설했으며 1998년 제주대 의과대학이 마지막으로 신설되면서 2000년에 의과대학 정원이 3273명에 이르렀다.

2000년 이후 의과대학은 정원 확대가 아니라 오히려 정원 감축이 진행되어 현재의 정원 3058명이 20년간 유지되고 있다. 또 마치 의과대학 정원 논의는 정부와 의협의 합의 의제일 뿐 아니라 의협의 투쟁 대상인 듯한 비정상적 상황도 벌어져 왔다.

12월17일 서울 국회 앞에서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들이 의사 집단 진료 거부 관련 여론조사 및 인력 실태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60분 내 집중치료실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 주민 월등하게 많아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실시되면서 국민의 의료 접근성이 크게 제고되었고 의료 수요도 증가하면서 지난 20년간 전 국민의 경상의료비는 6.4배 증가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의사 수는 약 1.7배 증가에 그쳤다. 의사 인력 양성 정책과 의료제도 개혁의 미흡으로 인해 의사의 지역별·분야별 불균등한 분포 등으로 한국에서 지역의료와 필수의료가 취약해져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은 오래전부터였다.

지역 필수의료는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건강 요구를 지역에서 충족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다. 지역 필수의료에는 일차진료, 급성기 및 응급진료, 예방 및 공중보건 서비스 등이 포함되는데 이의 목표는 건강한 삶을 영위할 기본적인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지역 필수의료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다. 수도권에 비해 지방의 의료 자원과 인프라 및 의료진이 부족한 상황이며, 이로 인해 지역 간 의료 서비스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또한, 전문 의료인력의 수도권 집중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어, 지방에서는 상대적으로 의료 서비스의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지역 응급의료 수준의 지표로 활용되는 중증응급환자 유출률은 광역지자체인 도 규모의 지역에서는 수도권에 비해 3~4배 높으며, 또한 60분 내에 집중치료실 접근이 불가능한 인구 비율도 광역시의 2~3배에 달한다. 서울의 빅5 병원 등은 지방 환자 비율이 40%를 넘는다고 한다.

의료 취약 지역인 광역지자체들은 타 지역에서 지출하는 관외 진료비가 30~40%를 넘으며 관외 지출 비용 중 입원비가 40%를 넘어 중증 치료를 받을 때 타 지역에서 치료받는 고통을 겪고 있다. 특히 중증 환자가 수도권 대형 병원에 쏠리면서 지방 의료 거점 도시의 의료 상황도 악화되고 있다. 지방의 대권역별로도 의료 서비스가 일부 도시 지역으로 집중되고 있어 시골의 동네의원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농어촌 지역에서는 의사 배치 없이 보건진료 전담 공무원 혹은 간호사만 배치돼 있는 보건진료소와 보건지소가 간단한 처치와 예방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어 일차의료조차 위협받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실정이다.

세계 많은 국가에서도 의료 서비스 확충 과정에서 의료인력 불균형을 겪었다. 미국은 의사면허가 주별로 발급되고, 의사가 다른 주에서 활동하려면 규제 기관에서 면허 이전 절차를 거쳐야 한다. 농촌 지역으로 의사가 부족한 워싱턴주 등 5개 주(Washington, Wyoming, Montana, Alaska, and Idaho)는 일차의료 미국 1위인 워싱턴 의과대학이 주축이 되어 의료임상교육 컨소시엄을 이뤄 240명 정원으로 TRUST(Target Rural Underserved Track) 교육과정을 진행해 지역 의료인력 양성과 정착에 성공을 거두고 있고 미국 의사협회가 매우 혁신적인 사업으로 평가했다. 캐나다는 북부 온타리오 2개 대학의 기존 의대와 연계한 교육으로는 지역의료 공백을 메꿀 수 없어 두 대학에 캠퍼스를 설치한 독립적인 의과대학 신설로 해결했다.

 

TRUST, 농촌 지역용 의료인력 공급에 성공한 미국 사례

원활한 의료체계 구축을 위해 정부와 의료계 종사자, 정치권, 국민 사이의 합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신뢰가 없어 보인다. 뒤에 숨겨놓은 카드가 있으면 믿고 대화할 수 없다. 기존 정원 49명으로 공공보건의료의과대학(의전원)을 만든다는 법안에 굳이 의료계가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하는 이유는 앞으로 특수목적 의과대학 형태인 공공의대로서 의전원을 계속 만들어갈 것이라는 의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의사제는 일부 제동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졸업 10년 후에는 수도권으로 의사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지방 의과대학 졸업생 대다수가 수도권에서 수련하고 지방으로 오지 않는 상황이 재현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굳이 지역의사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먼저 의대 정원 증원을 결정한 후 대학별로 현행 의과대학의 지역인재전형을 활용해 일부 정원을 미국의 TRUST 교육과정처럼 지역의료 트랙에 할당하고 졸업생을 지역의료면허와 연계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료 체계 확립을 위해 의대 정원 증원, 필수의료와 의료 취약지 지원 방안 등 정책 패키지를 만들어 마스터플랜과 함께 제시하고 의료인들의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중재하고, 추진할 수 있도록 법적 제도를 만들어줘야 한다. 의료계는 의료정책을 더 이상 투쟁의 대상으로 여겨서도 안 되고 극한 대립을 통해 기득권을 지켜 나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 이제 정치권, 정부, 의료계 종사자 모두 진영적 시각을 떠나 합리적 분석과 해법을 논의하면서 국민의 의료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의료 소비자인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의과대학 정원 증원 반대는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기영 순천대 교수·전 대통령정보과학기술보좌관
박기영 순천대 교수(전 대통령정보과학기술보좌관)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