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말’이 아이를 데려다주지 않는다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4.01.01 07:05
  • 호수 1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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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에 기여하는 집단들이 있다” “(방송에) 온통 《나 혼자 산다》, 불륜, 사생아, 가정 파괴 드라마가 너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국회 인구위기특별위원회 소속인 서정숙 국민의힘 의원이 한 말이다. 우리 사회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있는 저출생 문제의 한 원인으로 일부 방송 프로그램을 겨냥한 것이다. 방송 프로그램을 저출생 문제와 연관 지어 비판한 사람은 그이뿐만이 아니다. 한때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나경원 전 의원도 재임 당시에 한 방송에 나와 “《나 혼자 산다》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다.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걸로 너무 인식이 되는 것 같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그러면서 “정책도 바뀌어야 하지만 모든 언론, 종교단체, 사회단체들이 다 같이 하는 캠페인도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저출산 대책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시사한 가운데 26일 서울의 한 공공산후조리원 신생아실의 모습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저출산 대책에 대한 근본적 전환을 시사한 가운데 26일 서울의 한 공공산후조리원 신생아실의 모습 ⓒ연합뉴스

물론 이 발언들은 출생률이 터무니없이 낮은 데다 반등할 기미조차 거의 보이지 않는 우리 현실이 너무 답답해서 나온 지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디어 수용자들의 주체성을 간과한 진단”이라는 전문가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 같은 접근은 극히 근시안적이다. 그 기저에는 미디어 수용자들이 방송에 나타난 이미지나 메시지를 수동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그처럼 ‘교육을 받듯이’ 방송을 대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이는 자칫 국민들을 새마을운동 하던 시대에서 여태 진화하지 못한 미개 집단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느냐는 의구심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린 우리의 출생률을 선전·선동과 같은 단순·고루한 방식으로 끌어올릴 수 없음은 자명하다. 국민들은 정부가 캠페인 등으로 스피커 볼륨을 높이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길을 자신 있게 결정할 만큼 이미 현명하고 똑똑하다. 따라서 메시지 공세로 국민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구시대적 순진함 혹은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지난해 12월7일, 자녀 출산 계획이 특별히 없거나 아예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작심한 청년세대 ‘무자녀 부부’ 12명이 모여 토론한 보건복지부의 행사에서 한 참가자가 한 이 말은 의미 깊게 새길 만하다. “돌잔치에서 아이가 걷는지부터 시작해 학교와 직장까지 계속 비교하잖아요. 그 무한경쟁에 부모로서 참전할 자신이 없어요.” 또한 통계청이 12월15일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3’에 따르면, 모든 연령대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로 꼽힌 것은 ‘결혼자금 부족’이었고, 20대가 출산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지목한 고려사항은 ‘경제적 여건’이었다.

곤두박질친 출생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현시점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이들을 괴롭히는 과도한 경쟁 체제를 해체하고 어른들이 결혼·출산을 큰 걱정 없이 결심할 수 있도록 여건을 개선해주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러러면 정책 결정자의 인식부터 과거에서 미래로 빠르게 이동해야 한다. 강요하듯 떠드는 이런저런 말들이 우리 사회에 아이를 데려다주지는 않는다. 아무런 이유나 근거 제시도 없이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이 최선이라고 막무가내로 권하는 행위는 주거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 허허벌판에 가서 살라고 떠미는 것과 다름없다. 2024년 새해에는 사회 구조가 바뀌어간다는 희망이 모두에게 깃들어 우리 주변에서 더 많은 아이가 ‘기쁘게’ 태어나 ‘기쁘게’ 자라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결혼·출산은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건’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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