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된 딸에게 평생 미안했는데”…法, ‘가습기살균제’ 국가책임 인정
  • 정윤경 기자 (jungiza@sisajournal.com)
  • 승인 2024.02.0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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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3명에 300만~500만원 지급 명령…정부 “상고 검토”
숨진 딸의 오빠와 엄마 뒤에 당시 사용했던 가습기 통이 놓여 있다. ⓒ유족 제공
'가습기 살균제'로 숨진 고(故) 이의영씨의 오빠와 엄마의 모습. 이들 뒤에 당시 사용했던 가습기 통이 놓여 있다. ⓒ유족 제공

“하늘에 있는 딸을 보기가 이제 조금은 편안해질 것 같아요.”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가 숨지거나 다친 피해자와 유족에게 국가의 배상 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제조업체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에 대한 책임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봤던 원심의 판단을 뒤엎은 것이다. 10년간 ‘법정 투쟁’을 이어온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은 이 같은 판결에 일제히 환호했다.

6일 서울고법 민사9부(성지용·백숙종·유동균 부장판사)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이들 중 3명에게 300만~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화학물질에 대한 유해성 심사와 이를 공표하는 과정에서 공무원의 재량권 행사가 현저하게 합리성을 잃어 사회적 타당성이 없거나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위법하다”면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이어 “환경부 장관 등이 불충분하게 유해성 심사를 했음에도 그 결과를 성급하게 반영해 일반적으로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한 다음 이를 10년 가까이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용도와 사용 방법에 관한 아무런 제한 없이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공표하는 경우 국민의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할 가능성이 있었다”며 “불충분한 심사와 고시에 따른 가습기 살균제 제조·유통은 국민의 건강·생명·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고 직접적이었다”고 덧붙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법원의 첫 판단이 나오자, 피해자와 유족들은 “아이들을 살릴 길이 열렸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생후 50일 뒤 ‘흡입성 폐렴’으로 1995년 사망한 고(故) 이의영씨 아버지 이장수(68)씨는 시사저널과 통화에서 “의영이 엄마는 감기에 걸린 딸에게 본인이 가습기를 틀어줘서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에 평생 우울증을 달고 살았다”면서 “아이 엄마가 이 소식을 듣게 되면 평생 어깨를 짓눌렀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심경을 밝혔다.

이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국가 책임을 인정해 준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하늘에 있는 딸을 보기가 조금이나마 편안해질 것 같다”고 전했다.

또 다른 유족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모인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 “눈물이 나올 것 같다”며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부디 열리기를 기원한다”는 글을 남겼다.

10월30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신청자는 6892명으로 이 중 1566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은 가습기 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이 생전에 쓰던 장난감과 인형 등 유품들 ⓒ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 - 빼앗긴 숨' 온라인 전시관 제공
가습기 살균제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들이 생전에 쓰던 장난감과 인형 등 유품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진실 - 빼앗긴 숨' 온라인 전시관 제공

2008~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 10명은 2014년 국가와 제조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1심은 2016년 제조·판매업체의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했으나 국가 배상 책임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기각했다.

원고 10명 중 5명은 국가를 상대로 패소한 부분만 항소했고 이후 원심 판결이 뒤집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 중 2명은 동일한 성격의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상 구제급여조정금을 지급받았으므로 청구할 수 없다고 기각했다. 나머지 3명에 대한 위자료 액수는 구제급여와 이미 수령한 지원금 등을 고려해 정했다고 밝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선고를 내리기 직전까지 고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판부는 지난달 25일을 선고기일로 잡고 재판까지 열었지만 선고를 이날로 2주 미뤘다. 재판부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해 마지막까지 신중히 검토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송기호 변호사는 “국가가 단순히 피해자들을 시혜적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배상해야 하는 법적 책임을 확인했다는 의미가 큰 판결”이라면서 “국가는 이 판결에 상고하지 말고 피해자 배상을 최종적으로 국가의 법적 의무로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환경부는 관계 부처와 협의한 뒤 상고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한편, 가습기 살균제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오른 2011년부터 지난해 12월까지 확인된 피해자는 5691명, 사망자는 1262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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