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낭만 목포 골목 예찬
  • 글 김현정·사진 신규철 (kimhj@seoulmedia.co.kr)
  • 승인 2024.02.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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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남 목포의 산비탈 마을 서산동 시화골목을 걸었다.
담벼락에 쓰인 주민의 시와 저편의 바다가 그림처럼 어우러졌다.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았다. 아, 바다다. 몇 걸음 더 걷고 다시 돌아섰다. 낮은 지붕이 어깨 맞대고 이어지는 마을 너머 바다가 햇살에 반짝인다. 가슴이 뛴다. 지금 누군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바다가 어디냐 묻는다면 비탈진 골목 사이로 보이는 바다라고 답하겠다. 바다와 골목과 마을, 여기는 항구도시 목포다.

서산동은 목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자락에 들어선 마을이다. 2015년 목포대학교와 지역 예술가, 주민이 합심해 이 마을 이야기를 담은 시화전을 열면서 현재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했다. ⓒKTX매거진 신규철
서산동은 목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자락에 들어선 마을이다. 2015년 목포대학교와 지역 예술가, 주민이 합심해 이 마을 이야기를 담은 시화전을 열면서 현재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했다. ⓒKTX매거진 신규철

삶과 바다의 골목, 서산동 시화골목

KTX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어찌나 빠른지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북도를 2시간 30분 만에 주파하고 호남선 종착역에 여행객을 내려놓는다. 남쪽은 남쪽이라, 서울의 아침과 목포의 아침은 피부에 와닿는 온도가 벌써 다르다. 겨울날 남도의 햇살과 공기가 선물처럼 다가온다.

면적 50.65제곱킬로미터. 605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서울과 비교해 아담한 규모의 목포는 그 작은 땅에 갈 곳과 먹을거리를 꽉꽉 채운, 여행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시다. 이전의 여행도 풍경과 음식에 푸근한 목포 사람까지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했기에 계획할 때부터 설렜다. 우선은 바다가 그리웠고, 영혼이 머물러 ‘영달산’이라고도 불렀다는 유달산도 욕심났으며,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속에서 따스한 인간미를 간직해 온 사람의 이야기도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고른 곳이 서산동 시화골목이다. 목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유달산 자락에 집들이 서로 이고 지고 들어서 마을을 이루었다 했다.

서산동 시화골목 초입에는 영화 《1987》을 촬영한 연희네슈퍼가 있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사진 찍기 좋다. ⓒKTX매거진 신규철
서산동 시화골목 초입에는 영화 《1987》을 촬영한 연희네슈퍼가 있다.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사진 찍기 좋다. ⓒKTX매거진 신규철

출발점은 영화 <1987>에 나온 연희네슈퍼다. 비탈진 동네 아래쪽, 초록 간판 슈퍼가 여행객을 맞는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여는 순간, 시간이 30여 년 전으로 이동한다. 옛 담배 같은 실제 물품과 광고 포스터가 슈퍼 안의 달력을 1980년대 어느 날로 돌려놓는다. 추억이 있는 이는 추억을 떠올리고, 이런 물건과 슈퍼 자체가 생소한 이는 과거를 생생하게 상상하겠다. 자료 사진으로나 남은 한 시절을 다시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기분. 비좁은 가게를 서성이는데, 저 밖에서 엄마가 얼른 집에 오라고 부를 것 같았다. 넓고 세련된 어떤 상점도 갖지 못할 정서가 연희네슈퍼에 고여 마음으로 흘러 들어온다.

슈퍼는 마지막 평지다. 이제 계단이고 골목이다. 계단과 골목은 서산동 주민의 삶과 역사를 담았다. 평지와 비탈 가운데 골라 집을 짓는다면 당연히 평지에 자리 잡을 것이다. 서산동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었다. 일제가 목포를 수탈 기지로 삼고, 도로와 철도, 공장 등이 건설되자 주변 고장에서 사람이 모여들어 인구가 폭증했다. 면적이 넓지 않은 목포의 평지는 일본인이 차지했으니 주민은 비탈로 가야 했고, 서산동도 이때 탄생했다. 골목과 계단은 비정형으로 구불구불하다. 산 지형을 살살 달래 가면서 힘겹게 한 집 한 집 올렸으니 당연한 결과다.

시화골목은 세 갈래로 나뉜다. 이름하여 첫째·둘째·셋째골목. 어느 골목을 선택하든 사랑스러운 풍경과 글, 그림이 기다린다. 2015년 인문도시 사업 일환으로 목포대학교와 주민, 지역 예술가가 합심해 동네 이야기를 담은 시화를 제작한 일이 시초였다. 평범하게 낡아 가던 동네의 가치를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호응을 얻고, 지역 예술가가 마을에 들어와 작업실을 꾸리는 등 관심을 기울였다. 3년 사업이 끝나고도 꾸준히 듣고 쓰고 사진 찍고 그렸다. 마을 사람끼리만 알던 사연이 예술을 입고 작품이 되었다.

시화골목은 크게 세 개로 나뉘는데, 어느 길을 선택해 걷든 위쪽 보리마당으로 이어진다. 낮은 지붕이 어깨를 맞대고 선 좁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마을 풍경이 일품이다. ⓒKTX매거진 신규철
시화골목은 크게 세 개로 나뉘는데, 어느 길을 선택해 걷든 위쪽 보리마당으로 이어진다. 낮은 지붕이 어깨를 맞대고 선 좁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마을 풍경이 일품이다. ⓒKTX매거진 신규철

고운 시, 다정한 색의 위안

“자득들 여그서 여우고/ 아들들이 잘되었제/ …(중략)…/ 늙어서 아픈 게 그라제/ 아픈 게 숭이제”(손○애, 85세). “터미널에서 33년간 일했제/ 일은 힘들어도/ 일 끝나고 어울려 논 것이 제일 재밌었제/ …(중략)…/ 목포의 눈물, 완행열차 불렀제/ 팔자에 타고난 고생/ 그래도 그때가 즐거웠제”(김○순, 84세). 주민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쓰고, 주민이 직접 그림도 그렸다. 두 사람이 아슬아슬 지나갈 좁은 골목, 조그만 집의 담벼락은 훌륭한 전시 공간이다. 차도 못 들어오는 마을에 연탄 나르고 물 길러 가족을 건사한 분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쉼표 없이 달려온 인생을 달랑 몇 줄로 요약하고 손사래 치며 웃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거기 계신다. 집과 담의 색이 그분들 얼굴만큼 곱기도 하다. 시를 읽다 예쁜 색에 감탄하다 문득 뒤를 돌면 아, 바다가 반짝인다. 목포 바다는 여행자 마음에도 물결이 치게 하는가. 이 골목은 중력이 특별히 강한지, 발바닥을 자꾸 잡아끌어 수시로 멈춰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했다.

계단 끝에는 보리마당이 나온다. 손바닥만 한 땅에 재배한 보리를 널어 말리던 곳이자 주민이 인생사 희로애락을 나누던 곳이다. 2020년 방영한 드라마 <도도솔솔라라솔>을 여기서 촬영했다. 바다를 배경으로, 고만고만한 집이 촘촘히 늘어선 마을 풍경이 하도 정다워 마음속 맺힌 무언가가 사르르 녹는다. 이 골목에서는 누구나 착한 사람이 될 것 같다.

마을을 떠나기 전, 연희네슈퍼 건너편 서산동갤러리에 들렀다. 서산동과 목포를 사랑해 머물며 활동하는 전경삼 시인, 김신 사진가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잠시 다녀가는 여행자가 서산동을 얼마큼 알까. 예술가 덕분에 마을의 새벽과 밤을, 사계절을 본다. “삶이 낯선 쪽으로 흘러왔다는 것을, 누구에겐들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미처 드러낼 수 없는 사연 얼마쯤은 마음 어두운 쪽으로 물러 두면 그만이고, 빛무리진 마음 어르며 달래며 하루하루 건넌다.”(전경삼의 시 ‘서산동’ 중) 목포와 서산동을 담은 책갈피를 챙겨 나오는 길, 시인이 갤러리 밖까지 친히 배웅한다. 서산동만큼 따뜻한 배웅이다.

서산동갤러리는 서산동과 목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인, 사진가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목포대교는 목포에서 부동의 야경 명소다. 4.1킬로미터 길이의 다리가 다도해를 가로지른다. ⓒKTX매거진 신규철
서산동갤러리는 서산동과 목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인, 사진가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목포대교는 목포에서 부동의 야경 명소다. 4.1킬로미터 길이의 다리가 다도해를 가로지른다. ⓒKTX매거진 신규철

내 마음속 1번국도 기점, 목포

오늘 하루를 건넌 해가 목포 바다 아래로 잠길 즈음, 바다로 향한다. 날아오르는 학을 닮은 형상으로 뭍과 고하도를 잇는 목포대교의 노을과 야경을 감상할 참이다. 목포는 호남선 철도에 1번국도 기점이 있는 교통 요지다. 서울을 거쳐 신의주로 가는 1번국도가 고하도 신항을 출발해 곧장 목포대교를 탄다.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한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4.1킬로미터 다리에 조명이 들어오고, 숨 막히는 다도해 절경은 차츰 어둠에 몸을 기댄다. 사는 날 동안 몇 번이나 목포를 더 볼 수 있을까. 목포에 앉아서 벌써 목포를 그리워한다. 목포 여행자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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