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없어 겁 없는 스토커들
  • 차형석 기자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2.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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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보내 위협해도 경범죄…피해자, 해코지 두려워 속앓이만



지난 9월26일 서울의 한 대학은 2년 넘게 후배 여학생(26)을 스토킹한 휴학생(29)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과 선배인 이 남학생은 강의실까지 들어가 학업을 방해하고, 여학생의 집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비정상적 구애를 일삼았다.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열차에 뛰어들겠다’는 협박은 예사였다. 여학생 가족이 파출소에 신고해 구류를 살기도 했다.


여학생은 1년 전 교내 성폭력상담소에 신고했고, 올해 초에는 협박 혐의로 이 남학생을 고소했다. 이 남학생은 학교 상담소에 불려온 뒤에도 반성하지 않다가 결국 중징계를 당하게 되었다. 스토킹을 이유로 학사 징계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여성의전화 이민주씨는 스토킹을 처벌하기 어려운 이유로 관계 법령이 미비하다는 점을 들었다. 미국에서는 1990년 캘리포니아 주가 형법에 스토킹 관련 규정을 삽입한 이래 1993년까지 거의 모든 주가 스토킹 방지 법률을 제정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스토커에게는 1년간 구금형 혹은 천 달러 이하 벌금형을 부과한다. 일본도 2000년 5월 ‘스토커 행위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스토킹에 대처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스토킹 관련 법령이 전무해 스토킹을 경범죄 정도로 처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은 ‘스토킹 무법(無法)지대’인 셈이다. 1999년 5월 ‘스토킹 처벌에 관한 특례법안’이 15대 국회 때 상정되었으나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스토킹이 범죄라는 사회적 인식이 낮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스토킹을 당한다 하더라도 경찰이 손을 쓸 도리가 없다. 지난 7월 초순,구숙현씨(29·가명)가 운영하는 한 보습 학원으로 소포가 배달되었다. 구씨는 소포를 뜯다가 내용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포 안에는 칼이 있었다. 순간 구씨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동네에서 그저 한두 번 마주쳤을 뿐인데 ‘만나자’며 학원을 찾아오고,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온 청년이었다.

소포를 받고 얼마 뒤 전화벨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그는 “내가 보낸 선물을 잘 받았느냐”라고 물었다. 구씨는 얼른 전화를 끊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 달 정도 지나 소포를 보낸 남자가 붙잡혀 경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왜 과도를 소포로 보냈느냐고 물었다. “과일 깎아 먹으라고 과도를 보냈다”라고 그는 진술했다. 그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구씨는 그가 다시 학원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만 했다. 그는 사설 경호업체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잘못 인정 안해 상담 치료도 어려워


스토킹은 한 사람에 의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 8월20일 문 아무개씨(30)는 최진실씨에 대한 유언비어를 인터넷에 올려 명예훼손 혐의로 두 번째 잡혀 구속되었다. 그는 최씨의 남편인 야구선수 조성민씨의 광적인 팬이다. 조씨의 생년월일과 자신의 생년월일을 입력해 컴퓨터 점을 보았더니 커플 확률 100%가 나와 하늘이 점지한 인연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씨는 일본에 있는 훈련장에 가서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최씨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긴 문씨는 최진실씨의 아들·나이·과거에 대해 근거 없는 내용을 수십 차례 인터넷에 올렸다. 문씨는 6월 경찰에 잡혔지만 영장 실질 심사에서 정신과 진찰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영장이 기각되었다. 그러나 다시 글을 올리다가 결국 지난 8월20일 검거되어 구속되었다. 담당 경찰은 “문씨가 지극히 정상적이고 논리적인데, 유독 조씨 부분에 대해서만은 집착하는 비정상적 태도를 보였다”라고 말했다. 권희경 상담 전문가는 “스토커들도 심리적 강박이나 망상을 겪어 전문가의 상담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스토커에 대한 치료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스토커 대부분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치 않아 상담 전문가가 개입하기 힘들다.


이 때문에 스토킹은 더 큰 범죄로 이어진다. 스토킹을 상대방에게 몇 번 추근대다가 제풀에 꺾여 물러나는 ‘낭만적 구애’로 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정미씨(44·가명)는 2년 전 남편과 이혼하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나 아무개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10월. 손님으로 찾아온 나씨는 스토커로 돌변했다. ‘아내와 이혼할 테니 같이 살자’며 집요하게 따라 다녔고 밤늦게까지 전화로 심한 폭언을 했다. 양씨는 동네에 소문이 나고 혹시라도 스토커가 해코지를 할까 봐 경찰에 신고도 하지 못했다.


2001년 12월 나씨는 ‘마지막으로 만나자’며 전화를 해왔다. 양씨가 대문을 열어주자, 나씨는 사냥총을 들고 위협했다. 나씨는 강제로 양씨의 옷을 벗기고 사진을 찍었다. ‘같이 살지 않으려면 같이 죽자’ ‘사진 뿌리고 자녀들을 납치하겠다’ 등등 그의 협박은 점점 심해졌다.


혼자 속앓이를 하던 양씨는 2002년 5월 큰언니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고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양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지난 6월 나씨는 공갈·협박 혐의로 구속되었다. 피해자 양씨는 “전화 벨 소리만 나면 미칠 것만 같았다. 남들처럼 외출도 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스토커는 처벌을 받았지만 양씨가 받은 상처는 너무도 컸다. 스토커 가해자와 피해자가 늘어만 가는데도 사회적 안전망은 부실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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