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박’ 바람, 수도권까지 흔든다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11.05.15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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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원내대표 경선 통해 ‘계파 권력’ 대이동…친박계·중도·소장파가 주류 그룹으로 도약

▲ 5월13일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황우여 원내대표(왼쪽 두 번째)와 이주영 정책위의장(맨 오른쪽)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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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투표하나? 오늘은 선거 없지?” 지난 5월11일 오후 2시, 한나라당 의원총회(의총)가 열린 국회 의사당 회의실 앞. 일찌감치 도착한 황우여 신임 원내대표가 일일이 악수를 하며 의원들을 맞이했다. 농담 섞인 덕담이 쏟아졌다. 친박계의 한 중진 의원은 “또 출마해? 비대위원장 나오는 거야?”라며 농을 쳤고, 친이계 한 핵심 의원은 “당선 인사하시는 거예요? 축하합니다”라며 두 손을 건넸다. 황원내대표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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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참여하겠다는 의원은 적극 참여시키도록 하겠다.” 의총을 마친 후 소장파 의원들이 옆 회의실에 함께 모였다. 이들은 쇄신 모임 ‘새로운 한나라’를 공식 출범시켰다. 준비 모임 때 32명이던 참여 의원 수는 44명으로 늘어났다. 출범식 직후 국회 기자회견장. 공동간사를 맡은 정태근 의원(친이계)이 브리핑을 하는 동안 구상찬 의원(친박계)은 바깥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렸다. 두 의원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엿보였다.

이날 두 장면은 집권 4년차를 맞은 한나라당의 권력이 재편되는 과정에 돌입했음을 보여준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친박계와 중도·소장파 연합이 주류 자리를 꿰찼다. 이들이 지지한 황원내대표는 이날 의총을 통해 당 대표 권한대행에도 선임되어 ‘신주류’의 영향력을 넓혔다. 반면 그동안 당내 주도권을 잡아온 친이계는 일순간 비주류로 내려앉았다. 친이계 내에서도 계파 간 입장 차가 커 ‘구주류’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친이상득계’가 신주류와 손을 잡으면서 상황은 ‘친이재오계’가 고립되는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신·구 주류의 변화는 지난 2008년 4월 총선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띌 정도로 무게 중심이 확연히 바뀌었다.(그림 참조) 당시 범친이계 의원 수는 1백10여 명에 이르렀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진 이재오 특임장관, 이상득 의원, 정두언 의원이 핵심이었다. 여기에 정몽준 의원, 강재섭 전 의원과 가까운 인사들까지 힘을 보탰다. 반면 친박계는 홍사덕 의원 등 복당파까지 포함해도 40여 명 수준에 머물렀다. 이 밖에 남경필·권영세·원희룡 의원 등 중도 그룹이 20여 명 정도였다. 

이러한 권력 구도는 이듬해 5월에 치러진 당내 선거에서 안상수 원내대표 체제를 안착시켰다. 결선 투표에서 95표를 얻어 62표의 황우여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렸다. 당시에도 중도 그룹과 친박계가 연대했지만 친이계 주류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친이계와 친박계는 2010년 6월 국회 본회의에서 ‘세종시 표결’로 다시 맞섰다. 친이계로 분류되는 의원 중 90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반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의원 중 44명이 반대표를 던졌다. 야당의 반대로 법안은 통과되지 않았지만, 당내에서 친이 주류의 결속력을 재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난 5월6일 치러진 원내대표 선거 결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예전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당내 주류 친이재오계가 내세운 안경률 후보가 64표를 얻는 데 그친 반면, 친박계와 중도·소장파 연합이 지지한 황우여 후보가 90표를 얻어 예상 밖의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내 권력 지형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사실 올해 들어서면서 일찌감치 탐지되고 있었다. 특히 영남권에 기반을 둔 친이·중도 의원들의 고민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현 정권에 대한 지역 여론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동남권 신공항 공약 폐기 선언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다. 일부 친이·중도 의원들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줄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실제 몇몇 의원은 ‘월박(越朴)’ 선언만 안 했을 뿐, 사실상 친박으로 돌아섰다.

박 전 대표와 친분이 있는 한 영남권 인사는 “친이 성향 지역 의원들이 찾아와 박 전 대표에게 자신을 잘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는다”라고 밝혔다. PK(부산·경남) 지역 한 의원은 “이 지역 민심의 흐름을 볼 때 내년 총선에서 야당의 입지가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 간판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월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영남뿐만이 아니다. 수도권의 한 중진 의원은 “여건만 무르익으면 언제라도 입장을 밝힐 용의가 있다”라는 말로 사실상 월박 약속을 했다고 친박계의 한 인사가 귀띔했다. 이 의원은 차기 총선에서 공천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전 한 초선 의원은 본지가 자신을 ‘중도파’로 분류한 것에 대해 직접 전화를 걸어와 “나는 사실상 친박이다. 중도가 아니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업고 당 쇄신을 내건 ‘신주류’의 행보 역시 갈수록 탄력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신주류’의 앞길이 탄탄대로인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구주류’의 반격이 예고된다. 친이재오계의 한 인사는 “임무 교대를 하자면 할 수 있다. 당 쇄신을 시작하겠다는데 감 놔라 배 놔라 말하기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다. 독식을 하든 편식을 하든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일단 지켜보겠다”라고 밝혔다.

이미 친이 직계를 중심으로 반발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친이 직계인 한 핵심 의원은 “이명박 정부는 실패했거나 실패할 것이라고 보고 거리를 두고 또 차별화하려고 하는데, 자신이 만든 정권이 실패하고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틀렸다. 현 정권이 성공해야 당도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여기에 공감하는 의원들과 힘을 모아나갈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7월4일 전당대회가 권력 재편 ‘바로미터’

친박계와 연대해 ‘신주류’를 형성한 소장파에 대한 당내 불신도 적지 않다. 한 중진 의원은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뒷전인 경우가 많았다. 공공의 적이 있을 때는 큰소리를 내다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흐지부지되고는 했다. 이번에도 모임을 결성했지만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라고 밝혔다.

오는 7월4일로 예정된 전당대회(전대)에서 어떤 성과를 거두느냐가 중요하다. 소장파는 당권을 완벽하게 거머쥐겠다고 ‘젊은 대표론’을 내세우며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지난 원내대표 선거만 놓고 본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다. 친박계의 ‘전면 지원’에 친이상득계의 ‘측면 지원’이 더해지면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우선 전대는 원내 선거와 성격이 다르다. 선거 전략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전대에서는 당 쇄신이라는 명분보다 공천 등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조직이 얼마나 두터운지도 중요하다. 다양한 계파의 느슨한 연대가 힘을 발휘하기는 쉽지 않다”라고 내다보았다. ‘새로운 한나라’에 참여하고 있는 중도 성향의 한 의원은 “이미 당권 도전을 준비하고 있는 중진 의원들도 있는데, 이들과 맺고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전대에 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모임 내에서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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