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호르몬①] 영수증 만지기만 해도 환경호르몬 흡수돼
  • 노진섭 의학전문기자 (no@sisajournal.com)
  • 승인 2019.01.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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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뿌리의 경고 ‘환경호르몬’
정자 수 감소와 난임 등 생식 능력 저하로 이어져

 

네덜란드는 17세기 상업과 무역이 번성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 무렵 귀한 튤립은 귀족과 부유층 사이에서 부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먹을 것이 부족해 굶주림에 시달리던 네덜란드 국민은 개와 고양이는 물론 튤립 뿌리를 먹었다. 그런데 튤립 뿌리를 먹을수록 이상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도 늘었다. 특히 생리불순, 자궁 출혈, 불임 등이 나타나는 여성이 많았다. 

나중에 튤립 뿌리에 있는 특정 물질(피에스트로겐)이 그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 물질은 여성 호르몬과 유사해서 체내에 들어와 여성 호르몬의 정상적인 작용을 방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물질을 내분비계 장애 물질이라고 하는데, 체내 호르몬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고 때로는 호르몬처럼 작용한다고 해서 흔히 환경호르몬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환경호르몬의 화학 구조도 체내 호르몬과 유사하다. 

모든 화학물질에서 환경호르몬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환경호르몬은 대개 화학물질에서 검출된다. 인류는 현재까지 약 1억 종의 화학물질을 개발해 사용하고 있다. 이런 화학물질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대표적인 환경호르몬은 비스페놀A(BPA), 프탈레이트(phthalate), 노닐페놀(NP) 등이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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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PA는 예전에 젖병, 물병, 생수통, 식품 용기 등에 쓰였고, 지금도 물병, 물컵, 생수통 등에 사용하는 플라스틱 소재인 폴리카보네이트(PC)의 주원료로 사용한다. 또 통조림 캔의 내부 코팅제로 사용하는 에폭시 수지의 주원료이기도 하다. 일반인이 BPA에 가장 노출되기 쉬운 제품은 영수증이다. 영수증은 열에 반응하는 특수한 종이인 감열지로 만들어지는데, 여기에 BPA를 사용한다. 미국 환경단체 EWG에 따르면, 영수증 한 장에 들어 있는 BPA의 양은 캔 음료나 젖병에서 나오는 양보다 수백 배 많다. 

BPA는 먹을 때보다 피부를 통해 더 많이 흡수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스위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열지를 5초만 만져도 피부를 통해 0.2~0.6ug(마이크로그램)의 BPA가 흡수된다. 또 먹었을 때와 만졌을 때 몸에서 배출되는 시간이 다르다. BPA가 섞여 있는 과자를 섭취한 경우 섭취 후 5시간 뒤 소변에서 가장 높은 농도로 BPA가 검출됐고, 24시간 뒤에는 검출되지 않았다. 반면 BPA가 묻어 있는 물건을 5분간 만진 후 소변에서 BPA를 측정한 결과 48시간까지 소변에서의 BPA 농도가 점점 증가했다. 실험 대상자 중 절반은 5일 후에도 BPA가 검출됐고, 나머지 절반은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BPA가 검출됐다. 

계명찬 한양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BPA를 음식물로 섭취한 경우보다 피부를 통해 흡수됐을 때 더 오랫동안 체내에 잔류한다"며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훨씬 더 피부를 통한 BPA 흡수가 잘 일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보습크림 등으로 손에 적정 습기와 유분이 유지돼 BPA가 흡수되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프탈레이트 노출이 우려되는 제품은 바닥재, 완충재, 포장재, 접착제, 장난감, 식품 포장 랩, 수혈용 혈액 주머니, 가방 등이다. 이런 제품에 사용하는 폴리염화비닐(PVC)에 프탈레이트가 첨가된다. 본래 PVC는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소재이지만, 가소제가 더해지면 말랑말랑하게 변한다. 대표적인 가소제 성분이 프탈레이트다. 계 교수는 "가정용 비닐랩은 아니지만, 업소용 비닐랩엔 프탈레이트가 있을 수 있다. 배달 음식을 랩으로 포장하는데, 뜨거운 음식의 열로 인해 프탈레이트가 녹아 나와 국물이나 음식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닐페놀(NP)과 노닐페놀 에톡시레이트(NPE)는 계면활성제에 사용하며, 샴푸 등 생활용품을 사용할 때 피부를 통해 인체에 들어와 해를 끼칠 수 있다. 계면활성제는 물과 기름에 잘 섞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과거엔 샴푸, 비누, 세제 등에 사용했지만, 내분비계 교란 작용이 밝혀진 후 NP와 NPE는 사용이 금지됐거나 제한됐다. 계 교수는 "공중위생관리법상 사람이 그대로 먹을 수 있는 채소ㆍ과일에 사용하는 세제와 식기류를 씻는 세척제, 조리기구를 씻는 세척제 용도 외에는 사용할 수 있다. 즉 의류, 잉크, 페인트 등에는 사용할 수 있다. 세차할 때 사용하는 세척제 등에 환경호르몬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인간 생식 능력 떨어뜨리는 환경호르몬 

환경호르몬은 생식능력을 떨어뜨린다. 현대 남성의 정자 수가 할아버지 세대보다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다. 여성에서는 생리불순, 생리통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난임 질환이 증가한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2년 19만 명이던 불임 환자 수는 5년 후인 2016년엔 22만 명으로 증가했다. 

BPA는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유사한 구조로 돼 있어 여성 호르몬의 작용을 방해한다. 이 때문에 생식 능력 저하, 성조숙증, 발달장애, 대사장애, 고혈압, 유방암을 유발할 수 있다. 여아에게서 내분비계 교란을 통해 성호르몬을 조기에 상승시키고, 성장판이 일찍 닫히게 되어 뼈의 성장이 멈추고 키가 덜 자란다. 또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받는 시기가 길어지며 성인이 된 후 유방암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05년 6400여 명이던 성조숙증은 2016년 8만6000여 명으로 늘었다. 

계 교수는 "동물 실험에서 만성적인 BPA 노출은 프로게스테론(생식주기에 영향을 주는 여성호르몬)에 의한 착상과 초기 임신을 교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습관성 유산을 하는 임신부의 소변에서 BPA와 프탈레이트 등의 농도가 정상인보다 높다는 보고가 있다"며 "환경호르몬 노출의 제일 무서운 점은 배아 발달 기간에 노출이 되더라도 성숙할 때까지 뚜렷한 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환경호르몬의 노출에 따른 위험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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