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이너스 채권
  •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5 08: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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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후 넘치게 공급된 유동성…경기 개선 효과 없어 마이너스 채권 돈 몰려

돈을 빌리면 이자를 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상식이다. 이런 상식을 금융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한 것이 채권이다. 채권은 언제까지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그에 해당하는 이자를 주겠다는 증서다.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채권은 약속한 기간 동안의 이자 지급, 그리고 만기 시 원금 상황이라는 두 가지 조건으로 구성돼 있다.

채권 이자율은 발행 주체의 안정성과 시중금리에 의해 정해진다. 원금을 돌려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이자율은 높아진다. 이에 국가가 발행하는 국채가 가장 낮은 이자율로 발행된다. 일반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의 경우 기업 신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채보다 높은 금리로 발행된다. 국채의 경우 낮은 이자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투자처를 찾는 수요자에게, 회사채의 경우 일정한 리스크를 감수하지만 주식 등과 비교할 때는 상대적으로 안전하기 때문에 조금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는 수요자들에게 판매된다.

만약 채권 금리가 마이너스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만기까지 채권을 보유한 사람들은 이자를 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만기 때 원금에서 마이너스 이자만큼을 제외한 금액을 돌려받게 된다. 이런 채권이 과연 팔릴까 싶지만 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이러한 마이너스 채권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일러스트 김세중
ⓒ 일러스트 김세중

전 세계에 쏟아지는 마이너스 국채, 왜?

마이너스 채권이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2012년 한창 그리스 재정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유럽에서 독일 국채가 처음 ‘제로 금리’로 발행되고, 2015년 스위스 국채가 마이너스로 발행됐을 때만 해도 일시적 현상으로 간주되던 마이너스 채권들은 현재 국채뿐만 아니라 회사채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7월초를 기준으로 전 세계에 유통되는 마이너스 채권의 규모는 13조 달러를 넘어섰다. EU 회원국이 발행하는 국채의 10%가 마이너스 금리다. 독일, 네덜란드 등 주요국 외에 폴란드, 헝가리 등 주변 국가로 분류되는 국가들의 국채도 마이너스 금리로 발행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이미 전체 정부 발행 채권의 70%가 마이너스 금리다. 적당한 가격에 국채를 구입하기 힘들어진 투자자들이 회사채로 이동하면서 우량기업들의 회사채들은 마이너스 금리로 발행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정크본드 바로 윗등급에 해당하는 회사채들마저 마이너스로 발행되고 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마이너스 국채 물량은 전 세계적으로 50%, 회사채의 경우 3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마이너스 채권을 보유하면 손해를 볼 것 같은데 왜 이런 채권들이 발행되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유럽중앙은행과 일본은행 등은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해 왔다. 이 결과 유럽중앙은행의 기준금리는 현재 0%, 일본은 –0.1%, 스위스의 경우 –0.75%다.

이들 국가의 금융기관들은 법률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일정 비율의 지급준비금 등을 중앙은행에 예치해야 하는데 이자 소득은커녕 오히려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결국 이런 부담을 고객에게 떠넘기게 되고 고객들은 현금을 은행에 예금할 경우 은행에 이자를 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개인의 경우 이런 부담이 크지 않지만 대규모 현금을 예치해야 하는 기업 등은 이런 부담을 피하고자 안전한 국채를 찾게 된다. 국채 이자율이 마이너스라 하더라도 만기 시까지 보유할 경우 부담해야 할 손실액이 은행에 예금할 경우보다는 낮을 경우 국채를 선택하게 되면서 마이너스 국채가 유통되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세 차익에 대한 기대가 있다. 채권을 보유할 경우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은 만기 시까지 보유할 경우 얻게 되는 이자소득과 더불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채권 가격으로 구성된다. 고정된 이자를 지급하기로 한 채권의 경우 시중금리가 낮아질 경우 채권 가격은 올라가게 된다. 중앙은행이 현재보다 더 금리를 낮출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기존 채권 가격은 상승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미 마이너스 채권을 보유한 경우 마이너스 이자를 상쇄하는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

환율 역시 영향을 미친다. 해당 채권을 발행한 통화 가치가 상승할 경우 채권 표면금리는 마이너스라 하더라도 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채권을 보유하고 거래하게 된다. 물론 이런 설명들이 이론적으로는 이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 지금처럼 마이너스 채권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가장 큰 원인은 대량의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경기가 침체돼 있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를 비롯한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해 엄청난 유동성을 공급했다. 기준금리를 최대한 낮출 뿐만 아니라 중앙은행이 직접 나서 회사채를 비롯한 각종 채권을 구입하는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시스템 붕괴를 막았다. 이후 그리스로 대표되는 EU 재정위기가 닥쳤을 때도 중앙은행은 대량의 유동성을 공급해 대처했다. 미국 역시 경기침체 우려가 제기될 때마다 기준금리를 낮추는 등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부양 효과’ 못 내는 기존의 경기부양책

그런데 이런 노력의 결과로 공급된 유동성이 금융권에서 안정적인 수익만을 노리게 되면서 대량의 돈이 풀려 있지만 경기는 살아나지 않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 모든 국가의 경기가 후퇴하면서 구매력이 감소했고, 이에 따라 각종 상품은 물론 원자재 수요마저 감소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일정 기간 침체를 겪으면서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통해 산업구조와 경쟁력에 변화가 생기면서 공급이 축소돼 시장이 회복되지만, 2008년 이후 중앙은행의 지속적인 개입으로 이런 과정이 사라지면서 전 세계는 적극적인 투자보다는 금융 부문의 투자수익에 골몰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한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의 주식시장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넘치는 수요로 인해 마이너스 국채와 회사채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게 바로 2019년 8월의 모습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경기가 침체되면 이자율을 낮추고 돈을 풀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정부는 예산을, 중앙은행은 금리를 통해 경기순환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이런 방법들이 더 이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유동성은 넘쳐나지만 기대했던 경기의 개선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당연히 나타날 것으로 경계했던 인플레이션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진입한 것은 아닐까? 넘쳐나는 마이너스 채권은 우리가 이상한 나라에 와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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