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X101’ 조작 논란, 오디션 신뢰성 붕괴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0 10:00
  • 호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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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말고 실력’이라더니…공정성 흔들리니 ‘배신감’

경찰이 예능 조작 의혹 때문에 제작진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CJ ENM의 엠넷(Mnet) 채널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의 투표 조작 논란 때문이다. 그동안 예능 조작 의혹은 많았지만 인터넷에서 찻잔 속 논란 정도로 유야무야됐었다. 오디션에도 많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의혹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번 《프로듀스X101》 논란엔 경찰이 CJ ENM 건물 내 제작진 사무실과 문자투표 데이터 보관업체를 압수수색하기에 이르렀다.

검찰도 나섰다. 시청자들이 결성한 ‘프로듀스X101 진상규명위원회’가 서울중앙지검에 제작진 등을 사기와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고발했다. 그리하여 검찰도 조사에 돌입했다. 검경의 칼끝이 동시에 특정 예능 프로그램을 향하게 된 것이다.

일이 이렇게 커진 것은 너무나 이상한 수치가 적시됐고, 그것에 열성팬이 아닌 일반인까지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1위부터 20위 사이의 득표수 차이가 문제였다. 1위와 2위 사이, 3위와 4위 사이, 6위와 7위 사이, 7위와 8위 사이, 10위와 11위 사이의 득표수 차이가 모두 2만9978표로 일치한다. 그 밖에 7494표 차이, 7495표 차이, 11만9911표 차이, 10만4922표 차이도 각각 2번 이상씩 나타난다. 이런 수치가 우연히 반복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누리꾼 수사대는 더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모든 순위의 득표수와 득표수 차이가 7494.442라는 특정 숫자의 배수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이것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믿기가 어렵다. 특정 숫자를 상수로 하는 수열 프로그램 같은 것을 돌려서 수치를 만들어낸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CJ ENM의 엠넷(Mnet) 채널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의 한 장면 ⓒ Mnet
CJ ENM의 엠넷(Mnet) 채널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X101》의 한 장면 ⓒ Mnet

논란 키운 방송사 대처

이러니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슈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과거 오디션 조작 의혹 때는 보통 열성팬들 사이에서만 논란이 나타났었다. 이번에 논란이 이례적으로 커지자 엠넷 측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르렀고, 시청자들은 진상규명위원회를 결성해 검찰 고발에 나섰다.

의혹에 대처하는 방송사 측의 태도는 논란을 더욱 키웠다. 제작진은 처음에 “득표수를 득표율로 환산했다가 이 득표율을 소수점 둘째 자리로 반올림해 득표수로 재환산하는 과정에서 수치에 오류가 발생했으나 순위 자체엔 변동이 없다”고 해명했다. 투표를 했으면 득표수로 순위를 가리면 될 것을 왜 득표율로 바꾸며, 득표율 소수점 둘째 자리를 반올림했다고 해서 과연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수치들의 반복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누리꾼들은 이런 복잡한 해명 말고 그냥 단순하게 득표수를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엠넷이 재차 입장을 냈다. “자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했으나, 사실관계 파악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돼 공신력 있는 수사기관에 수사를 의뢰한다”는 것이다. 엠넷은 당사자이고 경찰은 제3자다. 당사자가 진실을 밝히면 될 것을 왜 남에게 규명을 의뢰한다는 것인지 의문이 나왔다. 혹시 “경찰은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도 나왔다. 원래의 득표수만이라도 공개하면 많은 부분이 투명해질 텐데 거기에 대해선 이야기가 없다.

게다가 엠넷 측이 오디션 참가 연습생의 소속사 관계자들에게 “수사 결과 피해자가 드러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합격팀에 추가 합류시킬 것을 원하는가”라고 물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진상을 누구보다 잘 알 당사자가 조작이 없었다면 ‘피해자의 존재’를 가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엠넷이 사실상 조작을 시인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심지어 과거 엠넷 오디션에서도 부자연스러운 수치들이 등장했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오디션, 특히 엠넷 오디션이 사면초가에 처했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시청자가 ‘국민 프로듀서’라면서 국민의 투표로 합격자가 정해진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순위를 조작했다면 대국민 사기극이 된다. 유료 문자 투표라서 법적, 도의적 문제가 더 커진다.

이 사건에 공분이 큰 것은 설마설마하던 오디션 의혹이 구체적으로 불거졌기 때문이다. 오디션엔 예능 이상의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 한국에서 계층 상승 사다리는 교육이었다. 개천에서 용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명문대를 소위 ‘있는 집’ 자녀들이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개천 용’ 신화는 저물었다. 로스쿨과 의학전문대학원도 부유층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면서 고시 패스한 고졸 변호사 노무현의 신화도 사라졌다. 사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2000년대에는 한류 열풍이 불면서 딴따라라던 연예인들의 사회경제적 위상이 수직상승했다. 이젠 연예인도 사회지도층 반열에 올라섰고 그에 따라 연예인 열풍이 불었다. 유명 기획사 오디션이 또 다른 고시가 됐다. 그때 오디션이 등장해 중졸 환풍기 수리공 출신 허각이 해외파 엄친아를 물리치고 1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로 시청자 투표를 통해서였다. 오디션이 집안 배경과 상관없이 본인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이 시대의 ‘공정 사다리’로 우뚝 섰다.

‘공정 사다리’라는 판타지의 붕괴

‘프로듀스’ 시리즈는 요즘 청소년들이 가장 열망하는 한류 스타 아이돌을 배출하는 오디션이다. 시청자들은 내 표가 정말 연습생들을 한류 스타로 만들어줄 거라 믿으며 열정적으로 투표운동에 나섰다. 그런데 이 모두가 조작이었다고 하면 배신감이 클 수밖에 없다. 결국 공정 사다리는 국민을 우롱한 판타지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사회적 공분이 이는 것이다.

방송사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도 지적된다. 제작진들 사이에 조작에 대한 불감증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민 투표라고 하면서도 투명한 관리체계가 없는 밀실 구조라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CJ ENM에 내부 감시자 역할을 할 노조가 없는 게 문제라는 진단도 있다.

그런데 꼭 CJ ENM 계열 프로그램이 아니어도 오디션에 대한 불신은 언제나 있어 왔다. 제작진이 편집으로 특정인을 밀어주고, 누군가는 시청자 ‘욕받이’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팬덤에 의한 조직적인 부정행위 의혹도 있었는데, 최근엔 특정인에게 투표한 사람에게 경품을 주는 식의 매표 행위까지 나타났다.

이 시대의 마지막 사다리라는 오디션이 매우 혼탁한 상황인 것이다. ‘국민’을 내세우면서도 사실은 국민을 속여왔다는 의혹도 매우 짙어졌다. 수사 결과에 따라선 제작진이 처벌받는 사태까지 생길 수 있다. 오디션이 다시 국민 신뢰를 회복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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