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끼어들기 금지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9 09:00
  • 호수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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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시내 한 대형마트에 있는 일본계 의류 매장을 찾았다. 그 회사 임원이 한국 내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대해 “(그 영향이) 장기간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던 의류 브랜드다. 최근 ‘NO 재팬’ 운동의 타깃이 되어 있는 만큼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다. 평소 주말이면 늘 붐비던 매장 안은 눈에 띄게 한산했다. 겨우 서너 명의 고객만이 옷을 고르고 있었다. 얼마간 더 지켜보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매장 앞을 지나가면서 던진 한마디가 귀에 꽂혔다. “불매운동 정말 대단하네.”

이 매장의 풍경이 말해 주듯 우리 국민이 보여주는 일본 불매운동의 결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고해지는 모습이다. 지난주 시사저널이 보도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우리 국민 가운데 무려 83.2%가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품 불매뿐만이 아니다. 지난 주말에는 빗속에도 10만여 명의 시민이 거리에 나와 “NO 아베”를 외쳤다. 주말 집회에 참가한 한 고등학생은 “2016년 중학교 3학년 때 박근혜 게이트를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 혼자만의 분노로 끝나지 않고 촛불로 이어졌다. 아베 정부가 벌인 경제전쟁 때문에 가슴속의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음을 굳게 다잡아 그동안 써오던 물건과 한순간 절연하거나, 찌는 듯한 무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거리로 나선 그 의지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단 하나, ‘당연한 분노’였다. 참을 수도, 뒤로 미룰 수도 없어 마땅히 터트릴 수밖에 없는 분노가 그들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온몸을 던져 함께 터트리는 마음들의 순수성은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국민들이 스스로 결정해 만들어낸 대오는 어떤 불순한 의도도 기웃거려서는 안 되는 ‘끼어들기 금지’ 구역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정치’라는 깃발을 들이밀려고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국민 모독’으로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명한 국민들은 이미 정치권이나 행정기관에서 나타난 일부 ‘숟가락 얹기’ 행태에 옐로카드를 내놓았다. 여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내년 총선을 연관 지은 보고서를 작성·배포해 질타를 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일본 전역 여행금지 구역 설정 검토’ 발언을 한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위원장이나, 관할구역에 ‘NO 재팬’ 배너기를 내걸려고 했던 서울 중구청의 행동이 환영받지 못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국민의 자발적인 행동을 힘 빠지게 한 ‘오버액션’에 대해 엄중한 경고를 받은 것이다. 앞으로도 누구든 국민들의 순순한 자기결정권에 정치색을 입히려 들 경우 똑같은 결과를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국민에겐 국민의 할 일이 있고, 그들에겐 그들의 할 일이 있다.

한·일 경제전쟁이 끝을 알 수 없는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맞은 올해 광복절, 우리는 또다시 힘겨운 싸움 속에 들어서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일본의 압제와 싸웠던 그때도 위대했고, 지금도 위대하다. 당연한 분노를 평화적으로 폭발시킬 줄 아는, 순백한 의지를 지닌 국민들이 있어 우리 모두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번 광복절,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수많은 사람이 광장에 모여든 이유 또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제74주년 광복절인 8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8·15 아베 규탄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일본의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제74주년 광복절인 8월15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8·15 아베 규탄 촛불 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일본의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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