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강간살인마 이춘재의 살인게임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15 08:00
  • 호수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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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탈을 쓴 악마의 두 얼굴 해부

잔혹한 연쇄살인마 이춘재(56)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두 얼굴로 살았다. 낮에는 ‘양의 얼굴’을 하고 밤에는 ‘늑대 얼굴’로 변했다. 평소 자신의 진짜 모습은 철저히 감추고 주변을 감쪽같이 속였다. 이씨의 ‘착한 평판’은 경찰 수사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보호막이 되기도 했다.

그의 외모도 경찰의 용의선상을 피하는 데 한몫했다. 이씨는 약 170cm의 키에 마르고 왜소한 체격이다. 계란형의 얼굴로 인상도 그리 나쁘지 않다. 여기에 피부는 뽀얗고 목소리는 중성을 하고 있다. 여느 연쇄살인마와는 차이가 있었다. 숱한 목격자와 몽타주까지 배포됐으나 정작 범인으로 지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숨은 얼굴’은 지역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물망처럼 포위하고 있던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의 살인 충동은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일어났다. 특히 이씨는 ‘여자’와 ‘성(性)’에 집착하며 살인을 게임하듯 즐겼다.

이춘재의 살인행각은 상상을 초월했다. 화성 살인 사건 10건(8차 포함)을 비롯해 30여 건의 강간·강간미수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처제 강간살인 사건까지 포함하면 살인만 15건이다. 지역별로는 화성 10건, 수원 2건, 청주 3건이다. 모두 합치면 45건에 달한다. 살인 피해자의 연령은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게 분포됐다. 도대체 이춘재는 왜 악마가 된 것일까.

ⓒ 일러스트 오상민
ⓒ 일러스트 오상민

군 제대 후 나타나기 시작한 살인 충동

이씨는 1963년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현 진안동)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는 논농사를 지었다. 고향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이씨는 고등학교는 인근 수원의 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조용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다. 말수가 적고 말썽 한 번 일으키지 않았다. 그와 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은 “투명인간 같았다”거나 “존재감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이웃들은 한결같이 “어른들한테 인사도 잘하고 성실했다”고 말한다. 가정환경도 특별나지 않았다. 이씨의 부모도 이웃주민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고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이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인 1983년 중순 군에 입대했다. 전차 조종수로 복무한 그는 군에서도 평범했고 특이점은 없었다. 1986년 1월 제대한 후에는 고향 인근 태안읍 안녕리의 한 전기부품 공장에 다녔다. 그의 살인행각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군에서 제대한 지 8개월 만에 첫 살인을 저질렀다.

이씨는 1986년 9월15일 수원에 있는 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귀가하던 이아무개씨(여·71)를 목 졸라 살해했다. 이씨의 시신은 실종 5일 만인 9월19일 오후 하의가 벗겨지고 다리가 X자로 모아진 형태로 발견된다. 이후 이춘재의 살인행각은 처제를 강간 살해하고 검거된 1994년 1월까지 8년 동안 이어졌다.

화성 사건(1~10차)은 모두 주거지 인근에서 발생했다. 지름으로 따지면 반경 12km 안에 들어간다. 이 중 1·2·3·6차는 주거지에서 직장(태안읍 안녕리) 통근길이 무대였다. 지금까지 발생한 연쇄살인 대부분이 범죄자의 거주지나 직장 등 지리적으로 익숙한 거점 주변에서 발생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영철과 강호순도 범행 장소로 거주지 인근 지역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춘재는 상황에 따라 지역을 넘나들며 살인행각을 이어갔다. 그가 자백한 살인 사건을 날짜별로 보면 그의 범행 동선이 그려진다. 이씨는 화성 사건으로 세 차례에 걸쳐 당시 수사본부의 용의선상에 올랐다가 빠져나왔다. 1987년 5월에 발생한 6번째 사건 이후 처음으로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 입증이 안 돼 풀려났다.

신분이 노출될 것을 우려한 이씨는 다음 범죄의 무대를 수원으로 옮겼다. 7개월 후인 1987년 12월24일 여고생 김아무개양(18)을 살해한 후 수원 화서역 근처에 유기했다. 피해자에게 재갈을 물리고 결박하는 데 속옷이 사용되는 등 화성 사건과 유사했다. 하지만 발생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별건 처리돼 미제사건으로 종결됐다.

이때 이춘재는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수사망에서 벗어나자 자신감이 생겼는지 화성에서 7차(1988년 9월7일)와 8차(1988년 9월16일) 사건을 연이어 벌였다. 이씨는 1988년 말부터 1989년 4월 사이 두 번째 용의선상에 올라 경찰조사를 받았다.

그러자 다시 범죄 지역을 수원으로 옮겼다. 1989년 7월3일 수원시 권선구 오목천동에서 또 다른 여고생 정아무개양(17)을 살해해 야산 및 농수로에 유기했다. 이 사건도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화성 사건과 별개로 취급됐고 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

약 2개월 후인 1989년 9월에는 수원의 한 가정집에 흉기를 들고 침입했다가 강도예비 혐의로 붙잡혀 구속됐다. 이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1990년 4월 석방됐다. 이춘재는 경찰에 붙잡히자 “모르는 사람에게 구타를 당해 쫓아가던 중 피해자의 집에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범죄 패턴으로 볼 때 강도보다는 ‘성범죄’를 시도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1990년 초 이씨는 ‘화성 사건’ 세 번째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같은 해 11월 태안읍 병점리에서 귀가하던 중학교 1학년 김아무개양(14)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화성 9차 사건이다.

이씨는 1991년 1월부터 화성과 청주 공사현장을 오가며 일했다. 그의 살인행각은 청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해 1월27일 오전 청주시 가경동 택지조성 공사장 콘크리트관 속에서 방적공장 직원 박아무개양(17)이 숨진 채 발견된다.

지름 1m 콘크리트관 속에서 발견된 박양은 속옷으로 입이 틀어막히고 양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목 졸려 숨져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박양은 성폭행당한 뒤 목이 졸려 숨졌다는 소견이 나왔다.

사건 현장은 택지개발공사가 한창인 곳이었다. 주변에는 2.5m 깊이의 하수관로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기 때문에 평소 공사장 관계자 외에는 찾지 않는 곳이었다. 이에 경찰은 이 일대 지형에 익숙한 사람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현장도 ⓒ 연합뉴스
자료: 연합뉴스

무대 옮겨가며 살인행각 지속

당시 경찰은 3개월의 수사 끝에 박아무개군(19)을 유력 용의자로 체포했지만 법원이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무죄 판결하면서 미제로 남아 있었다. 5개월 후인 1991년 4월에는 화성에서의 마지막 살인인 10차 사건이 벌어진다. 주민 권아무개씨(여·69)가 버스에서 내려 귀가하다가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피살된 채 발견된다. 

이후 화성에서는 동일한 수법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언론은 연쇄살인이 멈춘 것으로 보고 온갖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다.

그러나 살인 무대가 바뀐 것에 불과했다. 1991년 7월 이춘재에게는 큰 변화가 생겼다. 청주 소재 건설회사의 굴삭기 기사로 취직하고, 얼마 뒤에는 회사에서 경리를 맡고 있던 이아무개씨(24)와 사귀다 결혼까지 했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아들까지 낳으면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이씨는 이미 살인에 중독돼 있었다. 결혼했다고 해서 습관처럼 몸에 밴 살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들을 낳은 후 청주에서의 두 번째 살인에 나섰다. 1992년 6월24일 오후 청주시 복대동의 한 상가주택에 침입해 주부 이아무개씨(28)를 목 졸라 살해했다. 발견 당시 이씨는 하의가 벗겨지고 전화줄로 목이 졸린 채 숨져 있었다. 경찰은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건 현장에서 나갔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했다. 피해자의 남편 등 주변인을 중심으로 수사를 폈지만 끝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다.

이춘재는 1993년 4월 아예 청주로 주소지를 옮겼다. 흥덕구 복대동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빌라를 얻어 가족이 함께 살았다. 하지만 얼마 뒤 다니던 건설회사가 부도나면서 아내의 벌이에 의지하는 상황이 됐다. 이씨 아내는 호프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씨의 가정생활은 이전의 ‘착한 평판’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아내와 아들에게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행사했다. 동서가 있는 자리에서 아내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손과 발로 피가 날 때까지 마구 때렸다. 어린 아들을 방에 가두고 폭행한 적도 있었다.

1993년 12월17일에는 아내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 목, 아랫배 등을 때려 하혈까지 했다. 결국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한 이씨의 아내는 다음 날인 12월18일 두 살배기 아들을 두고 가출했다.

이씨는 아내를 증오하며 앙심을 품었다. 이씨는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내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알아두라”며 범행을 암시했다. 또 동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내가 다른 남자와 다시는 결혼하지 못하도록 문신을 새기겠다”고 협박했다.

이씨는 아내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다가 대학교 교직원인 처제(20)를 성폭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를 위해 1994년 1월13일 오후 처제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수면제를 먹여 성폭행했다. 범행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웠던 이씨는 처제의 머리를 망치로 4차례 내려친 후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이씨는 성폭행, 살인,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2심은 사형을 선고했으나 대법원의 파기환송을 거친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씨는 1995년 부산교도소로 옮겨져 지금까지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이춘재는 교도소 안에서는 본모습을 숨기고 ‘착한 얼굴’로 지냈다. 24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 징벌이나 조사를 받지 않았다. 교도소 측은 이춘재를 ‘1급 모범수’로 분류했다. 이후 냉난방 시설이 갖춰지고 냉장고까지 있는 방에서 편한 생활을 해 왔다. 손재주가 좋아 2011년, 2012년 수감자 도자기 전시회에 직접 만든 도자기를 출품할 정도였다.

영원한 비밀로 묻힐 것 같았던 이씨의 살인행각은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수사에 덜미를 잡혔다. 경찰은 이씨의 범죄가 자백한 것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미제사건들을 모두 살펴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씨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해도 한국 범죄사에 ‘희대의 강간살인마’로 기록되게 생겼다. 

 

가학적인 변태 성향의 성도착증 

이춘재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며 ‘성범죄’와 관련이 있다. 범죄 키워드도 ‘성도착증’으로 집약된다. 이씨의 범행을 ‘성적 동기’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씨의 범행은 가학적이고 변태적이다. 피해자의 스타킹이나 속옷 등 소지품으로 손을 묶거나 얼굴에 뒤집어씌웠다. 옷을 모두 벗기거나 하의를 벗긴 후 다리를 격자 형태로 묶어놓기도 했다. 또 살해 후 시신을 크게 훼손했다. 성폭행만으로는 성적 쾌감에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씨는 결혼생활 중에도 성적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4년 1월 처제 강간살인 사건 후 이씨의 아내는 경찰에서 “남편이 폭력 성향과 성도착증이 심하다”고 진술했다. 전문가들은 이씨에 대해 ‘성도착증을 지닌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보통 ‘성도착증’을 가진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특정한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성장기에 성적 학대나 성폭행을 당했거나 비정상적인 성관계 등 성 개념이 잘못 형성됐을 때 영향을 준다. 하지만 이춘재의 성장기에는 이를 의심할 만한 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씨의 가족과 이웃들은 양육 과정에서 학대나 방임 등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군 복무 중에도 성추행이나 성적 학대를 당하거나 이와 관련해 문제가 야기된 적도 없다. 다만 경찰은 이씨로부터 “초등학교 때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졌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는 교도소 안에서도 성적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교도소 사물함에 음란물로 보이는 여성 사진 10장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교도소 안에서 음란물 소지는 금지돼 있고 규정 위반이다. 1급 모범수인 이춘재가 위험을 무릅쓰고 음란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성적 욕망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씨의 성도착증 형성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성장기 양육 환경을 더 분석해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특히 청소년기에 잘못된 성적 환상을 키우는 경험을 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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