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LPGA에만 무조건 목매지 않는다
  • 안성찬 골프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1.17 10:00
  • 호수 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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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프로골퍼들의 트렌드 변화…LPGA투어 시드 얻어도 美 진출 ‘신중’

여자 프로골퍼 장하나가 화제다. 10월27일 국내 유일의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BMW 레이디스(총상금 200만 달러)에서 우승했지만, 그는 국내 잔류를 선언했다. 우승자에게는 LPGA투어 출전권이 2년간 주어진다. 지난해 LPGA에 진출하며 신인왕을 차지하고, 올해 세계랭킹 1위까지 달성한 고진영 역시 이런 케이스로 미국에 진출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활약하는 정상급 선수들의 생각이 크게 변하고 있다. ‘무작정’ 떠나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박세리 신화’ 이후 앞뒤 가리지 않고 기회의 땅, 미국 진출에 목매던 10~20년 전과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부산에서 열린 BMW 레이디스 대회 중 우승경쟁을 벌인 ‘루키’ 이승연에게 ‘우승하면 미국에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아직 부족해서 만약 우승해도 당장 갈 생각은 없다. KLPGA투어에서 더 배우면서 실력을 늘려야 한다. 언젠가는 가겠지만 당장은 아니다. 내년에도 KLPGA투어에서 뛸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미 LPGA에서 통산 4승을 거두는 등 성공적인 투어를 뛰다가 2017년 6월 국내로 복귀해 KLPGA에서 뛰고 있는 장하나 역시 우승 직후 한때 LPGA 복귀 가능성이 대두됐으나, 결국 “기회가 되면 골라서 서너 개 (LPGA) 대회만 출전하고 싶다. 국내 투어에서 더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여전히 LPGA투어 진출은 골프에 입문한 한국 선수들에게는 ‘아메리칸 드림’의 최종 목표임에 틀림없다. 특히 박세리의 ‘맨발 투혼’으로 이룬 성공신화를 TV에서 보고 자란 세대들에게 LPGA 무대는 ‘황금벌판’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선수뿐 아니라 부모들도 함께 꿈꾸는 골프의 유토피아이자 파다라이스다. 박세리는 1996년 KLPGA투어 상금왕과 최저타수상까지 휩쓸며 한국 무대를 평정한 뒤, 그 이듬해 LPGA투어 퀄리파잉스쿨을 수석으로 통과하며 미국 무대에 첫발을 들였다.

2019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의 이승연 ⓒ Penta Press
2019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의 이승연 ⓒ Penta Press

준비 없이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사례도

당시 박세리는 3년의 적응기간을 생각하고 무작정 갔다. 언어장벽을 비롯해 문화 및 환경에 대한 적응 등을 감안했다. 하지만 막상 부딪친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초반 성적이 부진하자 스폰서를 했던 삼성도 귀국을 종용할 정도였다. 하지만 박세리는 버텼다. 1998년 5월, 메이저대회인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했다. 박세리(LPGA 통산 25승)는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슈퍼땅콩’ 김미현(통산 8승), 현재 SBS골프 해설위원으로 활약 중인 박지은(통산 6승) 등과 함께 2000년대 LPGA 무대에서 ‘트로이카’ 시대를 열며 골프 꿈나무들에게 ‘무한 꿈’을 키워준 것이 사실이다.

프로 세계는 ‘돈’에 따라 움직인다. 스폰서도, 대회도 돈이 많은 곳에 몰리기 마련이다. 올해 LPGA와 JLPGA(일본), KLPGA의 상금은 여전히 차이를 보였다. LPGA는 33개 대회에 총상금이 7055만 달러(약 820억8492만원)였다. JLPGA는 36개 대회에 총상금 37억500만 엔(약 394억8492만원)이었다. 반면 KLPGA는 29개 대회에 226억원의 상금을 놓고 샷 대결을 벌였다.

상금만 놓고 보면 당연히 미국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선수들이나 선수 가족이 볼 때는 조금 사정이 달라진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포츠 선수를 가진 가족은 대개 ‘올인’한다. 야구나 축구처럼 단체종목과 달리 철저하게 개인종목인 골프는 더욱 그러하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선수를 전담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골프장 이동과 캐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하는데 주니어 시절은 물론이고 프로골퍼가 돼서도 부모에게 의존하는 선수들이 적지 않다. ‘가족 희생’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한국 골프 환경이 척박했던, 소위 ‘박세리 이전’ 시대에는 국내에 선수 및 대회, 상금이 많지 않아 ‘노는 물’이 다른 미국과 일본에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국내에서 열리는 LPGA투어에서 우승하든가, 아니면 Q시리즈로 불리는 예선의 ‘지옥레이스’를 펼쳐야 했다. 2001년 국내 처음으로 LPGA투어 CJ나인브릿지 클래식이 열리면서 한국선수들에게 미국 진출의 기회가 주어졌다. 2003년 대회에서 우승한 안시현을 비롯해 2018년 고진영(KEB하나은행 챔피언십으로 대회명 변경)까지 5명의 한국 선수들이 우승을 차지하며 미국행 티켓을 획득했다.

하지만 LPGA투어에서 실패한 선수도 있다. KLPGA 신인상 출신인 백규정은 2014년 CJ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국가대표 출신의 백규정은 파워풀한 샷 등 상대방을 압도하는 기량으로 ‘포스트 박세리’로 평가됐지만, 2015년 데뷔 첫해 상금랭킹 57위, 2016년 랭킹 90위에 그쳤다. 뜻하지 않게 허리 부상까지 발생하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준비 없이 갑자기 떠난 것도 화근이라는 분석이다.

LPGA 인터내셔널 부산 2019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3라운드의 장하나 ⓒ Penta Press
LPGA 인터내셔널 부산 2019 LPGA투어 BMW 레이디스 챔피언십 3라운드의 장하나 ⓒ Penta Press

KLPGA 규모 커지면서 가성비 높아져

올 시즌 고진영은 270만 달러(약 31억5360만원)로 상금랭킹 1위, 신인상을 확정한 이정은6는 190만 달러(약 22억1920만원)로 2위, 박성현은 150만 달러(약 17억5200만원)로 3위에 올랐다. 상금만으로도 즐거운 비명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늦깎이’로 데뷔한 이정은5는 81위로 17만9000달러(약 2억900만원)만 손에 쥐었을 뿐이다. 104위 강혜지는 11만6800달러(약 1억3640만원)로 연간 경비를 제외하면 ‘본전’이다. 126위인 루키 전영인은 6377달러(약 745만원)로 ‘적자’를 봤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KLPGA의 위상이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올해 KLPGA 상금랭킹 1위 최혜진은 12억700여만원이다. 2위 장하나는 11억5700여만원이다. LPGA 상위 랭커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KLPGA투어를 뛰는 상위 랭커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이다. 이 때문에 미국보다는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보다 안정적인 국내 무대를 선호하고 있다.

이정은6를 매니지먼트했던 골프전문기획운영사 크라우닝의 김정수 대표는 “미국 진출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언어와 환경이 첫 번째 걸림돌이고, 기량이 LPGA투어에서 통한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것도 망설이게 하는 큰 이유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대표는 “KLPGA 대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가성비가 높아진 것도 국내에서 오래 뛰는 요인이 되고 있다. 가족끼리 움직여도 크게 돈이 들지 않는 국내 투어가 그만큼 편할 것”이라며 “특히 미국에서 실패한 선수들이 철저하게 준비하고 가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도 선수들에게 미국 진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올 시즌 KLPGA투어 대상과 상금왕, 평균타수, 다승왕을 싹쓸이한 최혜진이 미국 진출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향후 누가 LPGA 무대로 자리를 옮길 것인지가 또 하나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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