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건설시장, 다시 ‘절망의 땅’으로
  • 길해성 시사저널e. 기자 (gil@sisajournal-e.com)
  • 승인 2020.03.18 08:00
  • 호수 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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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 이어 국제유가 급락 ‘겹악재’…신규 발주·기존 사업 차질 불가피

세계에서 가장 큰 건설시장을 꼽으라면 단연 중동이다. 중동 국가들이 개발에 나설 경우 투입되는 금액은 ‘조(兆) 단위’를 넘어선다. 국내 건설업계가 해외수주를 위해 동남아·유럽·미국 등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지만 중동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 건설사의 해외수주 실적에서 중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큰 편이다. 1966~2018년 누계 기준 중동 수주는 전체 해외수주액의 54%를 차지한다. ‘중동=해외 건설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하지만 건설업계는 한동안 중동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중 무역분쟁과 유가 하락 등 대외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중동의 발주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해외수주 실적도 곤두박질쳤다. 지난해 연간 해외수주액은 223억 달러에 그치며 2006년(164억 달러)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코로나19 확산에 이어 국제유가마저 급락하면서 해외수주를 노리는 건설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코로나19 확진으로 공장 전체가 폐쇄된 한 건설기계업체 정문 ⓒ연합뉴스
코로나19 확산에 이어 국제유가마저 급락하면서 해외수주를 노리는 건설업계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은 코로나19 확진으로 공장 전체가 폐쇄된 한 건설기계업체 정문 ⓒ연합뉴스

“다시 회복되나 싶었는데…”

침체됐던 중동 건설시장은 유가가 회복되고 중동 국가들이 ‘탈석유 정책’에 기반한 인프라 구축사업을 본격화하면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3월11일까지 국내 건설사들이 중동에서 올린 수주액은 57억 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5억7000만 달러) 대비 10배 늘어난 수준이다. 전체 수주액에서 중동이 차지하는 비중도 14%에서 60%까지 높아졌다. 중동 시장의 호조세로 전체 수주액은 95억 달러까지 올랐다. 1분기도 안 돼 지난해 연간 수주액의 절반을 채우면서 건설업계는 올해 해외수주 부진에서 말끔히 벗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건설업계의 장밋빛 전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등장에 이어 산유국 간의 갈등으로 국제유가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배럴당 63달러까지 올랐던 서부텍사스유(WTI)는 이달 들어 40달러대까지 떨어졌다. 코로나19 여파로 중국의 원유 수요가 크게 줄면서 하방 압력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미국(20.5%)에 이어 두 번째로 석유 소비가 많은 나라로, 세계 석유 수요의 13.6%를 차지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시작된 1월 중순 이후 중국 석유 수요는 평소보다 20% 줄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요 산유국 간 갈등은 국제유가 하락을 부추겼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10개 주요 산유국은 최근 코로나19가 전 세계에 확산하면서 원유 수요가 감소하자 이달 첫째 주에 추가 감산을 논의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증산과 원유 판매가격을 인하하겠다고 나서는 등 러시아 견제를 위해 보복성 조치를 취하면서 국제유가는 30달러대로 곤두박질쳤다.

그동안 국제유가 흐름이 해외수주 실적과 궤도를 같이한 만큼 건설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유가 하락으로 재정 압박을 받은 중동 국가들이 신규 발주는 물론, 이미 발주해 놓은 플랜트 건설 일정을 연기하거나 취소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송유림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원유 가격이 20~30달러까지 내려오게 되면 산유국들의 재정 악화, 발주처의 경영 악화, 프로젝트의 수익성 하락 등으로 신규 프로젝트 발주가 취소·지연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며 “아울러 기존 공사 진행이나 공사비 수령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과거 건설사들은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해외 실적이 크게 악화된 바 있다. 2015~16년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는 미국의 셰일가스 생산에 대응하기 위해 원유를 증산하면서 공급과잉을 유도했다. 그 결과 2014년 8월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던 두바이유는 2015년 2월 50달러까지 떨어졌고, 2016년 1월에는 25달러로 최저치를 찍었다. 그사이 자금 사정이 어려워진 중동 국가들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줄줄이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2015년 국내 건설사들의 중동 수주액은 전년(313억5000만 달러) 대비 절반 수준인 165억 달러에 그쳤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의 국제유가 회복이 더딜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2016년 초 경기가 살아나면서 국제유가가 반등하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경기 회복에 필요한 모멘텀을 찾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원민석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 국제유가 급락 당시에는 2016년 경기 회복을 기반으로 국제유가가 반등하고 정유·화학 업종의 업황이 개선됐다. 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경기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인 입국 금지로 수주활동 제한

국내 코로나19 확산으로 중동에서 한국인의 입국 절차를 강화한 점도 부담스러운 요인이다. 3월11일 기준 한국인에 대한 입국 제한·금지 조치를 취한 국가는 114개국이다. 중동에서는 오만·사우디·이라크·카타르·쿠웨이트 등 10개 나라가 한국인 입국을 금지한 상황이다. 장기화될 경우 해외 사업장 운영·관리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중동 시장은 국내 건설사의 수주 텃밭이라 파견 직원이 많을 뿐 아니라, 국내와 교류도 잦은 편”이라며 “현지 주재 직원들이 복귀가 늦어진 인력의 업무를 대신하고 있지만, 장기화될 경우 과부하에 따른 처리 지연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한국인 입국 금지 조치로 인해 추가 해외수주도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해외 발주기관을 방문하기 어렵고, 발주기관을 초청해 건설기술과 경쟁력을 알리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종국 해외건설협회 대외협력실장은 “입국 금지가 현실화되면서 중동에서 신규 프로젝트 발주 공고가 나와도 현지 활동이 제한되고 있다”며 “비대면 미팅은 한계가 있는 만큼 외교부에 한국 정부가 인정한 인원은 입국이 가능하도록 조치해 달라고 요구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중동에서 이란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만큼 최악의 경우 신규 발주 시장이 ‘올스톱’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중동은 코로나19 전파가 뒤늦게 이뤄진 만큼 사태를 수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며 “발주처들도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신규 발주를 하기 어려울 수 있다. 다만 기존에 진행 중이거나 시급한 사안 등 한정된 물량만 발주가 진행될 수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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