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던진 ‘EPN 파문’, 양자택일 요구받나 [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 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06.11 09:20
  • 호수 1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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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존도 높은 우리에게 치명타 될 수도

지난 5월21일 언론에 ‘경제번영네트워크(EPN·Economic Prosperity Network)’라는 낯선 단어가 등장했다. 미국 국무부의 키스 크라크 경제차관은 5월20일 브리핑을 통해 한국과 EPN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크리스토퍼 포드 미 국무부 국제안보·비확산 담당 차관보도 이 자리에서 “전 세계는 정보 도용, 인권 침해, 정치적 조작을 행하는 화웨이 같은 중국 기술업체 생태계 밖에서 신뢰할 만한 공급자를 찾고 있다. 한국의 삼성을 포함해 세계의 공급자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며 한국의 EPN 참여를 촉구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EPN에 대한 논의는 2019년 11월 크라크 차관 방한 때부터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개최된 제3차 한·미 민관합동 경제포럼에서 “한·미 모두 경제안보가 국가안보와 직결된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 “(한·미) 경제안보 (관계가)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 “(한·미가) 공정성, 법치주의, 지식재산권 존중 등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며 EPN의 핵심 키워드를 제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EPN에 한국의 참여를 요청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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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자국 주도 EPN 참여 요구한 미국

EPN은 세계의 공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중국을 배제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과의 파트너십 형성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별도의 글로벌 공급사슬(GSC·Global Supply Chain)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2000년 이후 형성돼 온 글로벌 무역체계에서 중국을 인위적으로 빼고, 믿을 수 있는 국가들만의 경제적 블록을 의미한다. 전 세계 산업·무역과 경제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올 수 있는 변화가 왜 논의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미국은 2015년 전후 중국의 급속한 성장을 의식하면서 자국의 글로벌 경쟁력이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의료장비, 의약품, 자동차, IT 제품 등에서 중국의 공급망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중국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해외로 이전한 사업체들을 미국 본토로 다시 불러들이고, 이를 통해 미국의 제조업을 되살리겠다고 약속했다. 또 관세 부과 등을 통해 중국을 압박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미·중 무역분쟁은 단순한 무역수지 개선이 아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전략의 시작이었다. 그 전략의 바로 다음 단계가 EPN다.

 EPN의 핵심은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데 있다. 중국은 40년 동안 광범위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으며 전 세계는 여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 EPN은 처음에는 일부 부품이나 소재를 중국 이외에서 공급받는 식으로 시작한다. 이후 다른 적절한 국가로 사업장을 이전하는 수준으로 확대한다. 이를 통해 중국을 국제무역과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제외시킨다. 결국 중국의 성장을 억제하는 전략이다. 미국 정부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글로벌 공급사슬의 핵심이 되는 부분과 병목지점들을 파악해 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의 전략 시행의 핵심은 ‘중국을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다. 미국의 구상은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의 블록인 EPN을 만드는 것이다. EPN은 민주주의 가치에 뜻을 같이하는 국가·시민사회·기업들로 구성된다. 교역·에너지·교육·의료·기술을 포함한 경제의 많은 분야를 포괄하는 미국 주도 경제 블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미국은 한국을 비롯해 일본, 호주, 인도, 뉴질랜드, 베트남 등 태평양 국가들을 대상으로 EPN 참여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 국가에 현재 중국이 수행하고 있는 글로벌 공급사슬에서의 역할을 대신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이미 확보돼 가동되고 있는 부품 조달체계와 잘 훈련된 제조인력, 그리고 각종 인프라를 포기하고 현재의 중국에서 다른 곳으로 생산 기반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부 부품이나 조립 라인 등은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지만 별도의 생산 라인을 설치하는 데는 시간과 비용이 소모된다. 일부 기업이 제조 공정을 중국 밖으로 옮기더라도 중국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부품 조달까지 이전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지만 현재 미국 정부는 기업들이 중국에서의 부품 조달 및 제조 공정에서 모두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할 방법까지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 생산시설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에 대해 중과세하거나 각종 지원을 축소하는 방식으로 압력을 가할 경우 기업들은 변화를 도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주력산업 대부분이 중국 수요에 맞춰진 韓

미국이 EPN 전략을 공식화할 경우 제일 난감할 국가는 우리나라다. 한국은 이미 중국을 최대 수출국으로 삼고 있으며,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고 있다. 우리의 주력산업 대부분이 중국의 수요에 맞춰 공급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직접투자 규모도 엄청나다. 특히 EPN의 핵심 중 하나인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품 및 기술 판매와 이전 봉쇄가 실제로 이루어질 경우 수출은 막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일본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점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구축해 온 동남아 지역의 생산 네트워크는 EPN을 통해 새로운 수요를 맞이해 규모 확대와 고도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만의 경우 EPN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어떠한 비용과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를 감내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대만 입장에서 보면 수십 년 동안 진행되어 온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결정적 기회를 EPN이 제공해 줄 수 있다. 

EPN이 어떤 형태로 진행될지는 아직 많은 것이 불확실하다.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선거 결과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대외적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양자택일에 내몰리는 최악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모든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대응 전략을 수립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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