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은 어쩌다 ‘대통령 숙원사업’이 됐나
  • 정우성 객원기자 (wooseongeric@naver.com)
  • 승인 2020.06.0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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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묘소 봉환 12년 대선 때도 공약
카자흐 교민들 “홍 장군은 정신적 지주…한국행 반대”
1992년 카자흐 수교 때도 북한 반대로 무산
ⓒ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정부는 올해 안에 카자흐스탄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다는 계획이다. ⓒ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문재인 대통령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올해 안에 국내에 돌아올 수 있도록 추진하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밝혔다. 올해는 홍 장군이 이끈 독립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둔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해진다.

홍 장군의 외손녀 김알라(78)씨는 9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카자흐스탄도 묘지 상태가 괜찮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외할아버지가 조국에 묻히는 것을 원하셨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다만 봉환은 유족이 동의했다고 해서 끝나는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카자흐 교민사회 “홍범도 장군이 구심점…봉환 어려워”

현재 홍 장군의 묘소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주에 있다. 지난해에도 문 대통령이 직접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만나 이 문제를 꺼냈지만, 현지 교민 사회가 유해 봉환에 반대했다. 지금도 홍 장군은 교민 사회 내에서 정신적 지주로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카자흐에 있던 독립운동가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만 지난해 국내로 옮겨졌다.

홍 장군은 1922년 봉오동·청산리 승전 소식이 알려지자 소련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소련에서 고려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자흐 교민들은 “출신 지역이나 활동 경력을 고려했을 때 홍 장군 유해가 북한과 한국 중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 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기도 했다. 실제로 홍 장군 유해 봉환은 1992년 카자흐스탄과 국교를 맺을 무렵부터 추진했다. 그러자 북한이 카자흐 정부에 “홍 장군 유해를 남한에 보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 무산됐다.

2019년 4월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가 국내에 돌아왔다. ⓒ 국가보훈처
2019년 4월 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가 국내에 돌아왔다. ⓒ 국가보훈처

평양 출신으로 평안도·함경도서 활동…소련 공산당 가입도

홍 장군은 평양에서 태어나 만주로 건너가기 전까지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1927년 60세 나이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해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살았다.

70세에는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고려인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하도록 하자 홍 장군 일가족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건너갔다. 그는 향년 76세 나이로 숨질 때까지 크질오르다 집단 농장을 운영했다.

문재인 대통령 ⓒ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 ⓒ 청와대

문 대통령, 2012년 대선 때도 독립운동가 묘역 조성 공약

국외에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 유해는 485위다. 그 중 봉환이 이뤄진 것은 작년 4월까지 139위 정도다. 아직도 346기가 남아 있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당시 후보와 맞붙었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문제를 처음 공약으로 제시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논란과 과거사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박근혜 후보와 차별화에 나선 것이다.

당시 문 후보는 “앞으로 남북관계가 정상화되면 유해 발굴과 기념사업 등 남북이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겠다”면서 “우리 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만큼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관 조성과 임정 요인들의 묘역 조성 등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홍 장군 봉환 추진 계획을 다시 한 번 밝혔다. ⓒ 페이스북 캡쳐
문 대통령은 지난 7일 봉오동 전투 100주년을 기념해 홍 장군 봉환 추진 계획을 다시 한 번 밝혔다. ⓒ 페이스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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