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투쟁 씩씩한 사랑, 그리고 한국의 교회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0.08.18 16:4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봄길 박용길》ㅣ정경아 엮음ㅣ삼인 펴냄ㅣ319쪽ㅣ1만5000원

기독교에서 보라색은 고난과 승리를 뜻하는 색이었다. 부인들이 똑같이 보라색 옷을 입고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는 모습은 애절하고도 씩씩하여 보는 이들에게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박용길은 1985년 12월 민가협이 창립되기 전까지 양심범 가족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협의회 선언문에는 ‘권력의 부당한 박해를 두려워 않고, ‘양심범과 그 가족들의 모임’을 지키고, 비밀을 지키고, 고문에는 양심선언으로 양심을 지키고, 단결한다’는 요지의 ‘우리의 일곱 가지 약속’이 들어있었다.

남편 문익환이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 박용길은 밖에서 가족들의 투쟁조직을 이끌며 성장해갔다. 모든 집회나 시위의 맨 앞줄에서 가장 겁 없이 싸웠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굳건히 싸운 가족운동은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기저의 원동력이었다.

갈릴리교회는 문동환,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이우정 등 해직교수들과 문익환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실혐적인 예배 공동체였다. 갈릴리교회가 추구한 것은 진보신학을 바탕으로 고난받는 민중들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기존의 교회 범주를 벗어난 여러모로 획기적인 신앙공동체였다. 1975년 8월 17일 갈릴리교회의 창립 예배에서 설교를 맡은 교회협의회 원로 이해영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란 항상 세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첫째는 바른 말을 할 준비요, 둘째는 감옥에 갈 준비, 셋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십자가를 질 준비를 해야 한다”

갈릴리교회는 고난받는 이들, 집을 철거당해 거리에 나앉은 도시빈민, 해고된 노동자, 구속자 가족들이 소식을 주고받으며 서로 힘이 되어주는 안식처였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던 간첩, 사상범으로 분류된 좌익사범의 가족들에게도 그 문을 열어주었다. 갈릴리교회는 목사가 아닌 평신도가 설교하기도 했다.

박용길은 갈릴리교회에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1983년부터는 세 번째 감옥을 살고 나온 문익환 목사가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갈릴리교회’라는 이름을 내걸고 교회의 책임을 맡게 됐다. 문익환의 감옥 재수감으로 인해 박용길은 갈릴리교회를 지키기 위해 더욱 사력을 다했다. 박용길이 감옥 안의 남편을 만날 수 있는 날은 별로 많지 않았다. 감옥 안의 문익환에게 힘이 돼준 것은 박용길이 끊임없이 보내는 ‘연애편지’였다.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평양방문을 감행했던 박용길이 평양을 떠나는 날이 밝아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겠다는 봄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평양 시민들에게 판문점에서 봄길을 배웅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1995년 7월 31일, 봄길은 34일간의 감격스러운 방북 여정을 마치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안기부에 구속, 수감되었다가 넉 달 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감옥이라고 다 같은 감옥이 아닌 것이라, ‘내가 너희의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2020년 지금, 봄길 박용길은 마석 모란공원에 늦봄 문익환 목사와 나란히 누워있다.

“활이 아닙니다.

칼도 창도 아닙니다.

기관총도 대포도 탱크도 아닙니다.

핵무기 전자무기도 아닙니다.

평화가 문제입니다.

하나도 평화 둘도 평화 셋도 평화입니다.

은하 성운 밖으로 밀려나는 평화를 보며

슬퍼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평화를 애타게 바라는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입니다.“

-문익환 시 ‘땅의 평화’ 중 일부-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