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로에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
  • 김재태 편집위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1.09 09:00
  • 호수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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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집을 나서며 보니 문 앞에 택배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어제 한 이커머스 업체를 통해 주문한 물건이다. 굳이 빨리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인데 추운 새벽길을 건너 벌써 당도해 있다. 업체에서 ‘로켓’이라는 이름으로 지정해 놓은 상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빠른 배송 서비스는 일부 회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다. 월정액을 내고 가입하지 않으면 그들이 요구하는 액수에 맞춰 당장 필요치 않은 물건까지 주문해야 하는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서비스다. 그래서 이 물건은 구매자의 상황이나 욕구와는 상관없이 저 혼자 바빠 총총걸음으로 여기 와 있다.

문 앞에 잠시 서서 이 물품을 들고 와서 놓고 간 누군가를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잠든 사이에 그는 조용히 움직여 시간의 길을 내고 부지런히 달려왔을 것이다. 그가 빠른 배송을 위해 깨어 있어야 했던 새벽은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생계를 위해 그 불안정한 시간 속으로 뛰어들어 잠을 쪼개 일했을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언택트 소비 급증 속에 3월17일 오전 서울 시내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 택배가 수북이 쌓여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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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언택트 경제’의 공간이 확장되면서 이커머스 등 온라인 쇼핑 업체와 운송업체들의 매출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뉴스는 전한다. 하지만 그 호황의 이면에서 비극 또한 함께 확장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숨 막히는 배송 릴레이에 지쳐 쏟아내는 비명을 듣지 못했다. 주문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밤샘 작업을 하고, 식사도 거른 채 일해야 했음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처럼 고된 일에 갇힌 이들에게 우리가 눈길조차 주지 못하는 사이 올해 들어서만 벌써 10명 안팎의 택배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특히 주문 물량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던 지난 추석 연휴를 전후해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 잇달아 전해져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철야 근무를 한 뒤 퇴근했다가 5시간 만에 다시 출근해 근무하던 중에 돌연사하거나, 아침 일찍 출근해 택배 물품 분류 작업을 한 뒤 오후에 배송을 나선 지 한 시간 만에 가슴 통증을 느끼고 쓰러지는 등 대부분이 과로 탓으로 추정되는 사망이었다.

그들을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구해 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당장 지난 20대 국회에서 일명 ‘택배법’으로 불리는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안이 발의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이 법안은 해당 소위원회 안건으로 상정까지 됐지만 여야가 서로 다투며 미적거린 바람에 결국 국회의원 임기 만료로 폐기되고 말았다. 신산업으로 주목받는 택배산업은 이런 헛걸음들을 거쳐 아직껏 법의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관련법이 일부 수정을 거쳐 다시 발의됐지만 언제 통과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택배회사나 운송회사도 마찬가지다. 개별 회사들이 주체적으로 근무자들의 노동환경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문제점들을 일찌감치 개선했더라면 이처럼 안타까운 죽음들은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늘도 우리가 잠든 사이에 적지 않은 사람이 새벽길을 나선다. 그들의 특별한 노동은 개인 삶의 일부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그들의 노동을 통해 우리가 얻는 편익 또한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길 위에서 새벽 추위를 견디는 그들의 어깨는 마침내 우리 모두의 어깨이자 대한민국의 어깨일 수밖에 없다. 그 어깨 위에 우리의 삶이 함께 얹혀 있음을 모두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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