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면 간파하는 글로벌 몽골제국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0.12.0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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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ㅣ모리스 로사비 지음ㅣ권용철 옮김ㅣ교유서가 펴냄ㅣ232쪽ㅣ1만3800원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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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인상적인 책이다. 몽골제국에 대해 가장 명료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몽골제국》을 평가한 사람은 펜실베니아대학 역사학과 아서 월드론 교수다. ‘명료하다’에는 책이 생각보다 두껍지 않다는 뜻이 포함돼 있다. 최초로 동·서양을 제패한 글로벌 제국의 흥망성쇠를 겨우 232페이지 안에 담았기 때문이다. 평소 책과 거리가 먼 사람일지라도 코로나19 바이러스 방역 2.5단계로 무료한 시간에 부담 없이 읽어볼 만한 두께다.

유사 이래 한반도를 괴롭혔던 중원(中原)의 국가들 중 몽골제국(원나라)은 보다 특별하다.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해 막강 몽골군에 맞서는 동안 육지 백성들은 살육 당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징기즈칸의 신임을 받아 동북아를 누볐던 몽골 장군 살리타이는 용인 처인성에서 승병장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원나라를 세운 5대 쿠빌라이칸 때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는 이후 100년 동안 왕비는 원나라 공주, 왕은 혼혈이었다. ‘몽골반점’의 유래를 여기서 찾는 사람도 있다.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36년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우리가 ‘정복자 징기즈칸’을 찬양할 입장이 아닌 것이다.

몽골제국에 대해 몽골인들이 직접 쓴 기록은 《몽골비사》가 유일하다. 절반은 신화이고 나머지 절반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나마 징기즈칸이 세계 정복에 나서기 전까지만 기록돼 있다. 몽골제국에 대한 나머지 기록들은 아시아, 유럽, 러시아 등 곳곳에 산재해 있다. 대부분 피정복민들이 기록한 것들이라 몽골군대는 ‘학살, 약탈, 파괴’의 대명사로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몽골군들은 항복하지 않는 적과 도시는 잔인하게 살육하고 파괴했다.

13세기 몽골이 제국을 이룰 당시 중국 본토의 인구는 7500만 명, 몽골은 10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 작은 인구로 아시아, 동유럽, 러시아를 순식간에 제패한 비결은 유목 중심의 생활환경, 시대를 앞서는 전략전술이었다. 여러 역사기록들을 분석해보면, ‘학살자’ ‘파괴자’로만 인식된 것과 달리 몽골의 정복지 칸들은 학문, 예술, 문화, 기술의 르네상스를 일으켰고, 사방교역으로 경제를 번창하게 했다. 명실공히 글로벌(Global), 세계사(世界史)의 서막을 열었다. 《몽골제국》은 징기즈칸부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게 쫒겨 원래의 몽골 초원으로 물러나 때까지 약 150년에 걸친 ‘팍스 몽골리카’를 관통한다.

혜성처럼 등장해 세계를 정복했다가 순식간에 소멸해버린 몽골제국의 몰락 원인은 첫째, 너무 광대한 지역을 빠르게 정복하는 바람에 로마와 같은 중앙행정체계를 갖추기 어려웠다. 둘째, 문명국가를 경험해보지 못해 칸(제위) 계승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징기즈칸의 직계 후손들이 너무 많아 권력투쟁과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군웅할거(群雄割據) 칸국들의 반복적 갈등과 분열이었다. 약술하자면 ‘무식한데 힘만 센 탓’이었다.

그 기간 몽골제국은 ‘파괴, 폭력’에 더해 첫째, 세계 각국의 무기·전략·전술·군사조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죽에 양기름을 칠한 안장과 등자는 몽골기병이 전력질주 하는 말의 상하좌우를 넘나들며 서커스에 버금가는 무술이 가능하게 했다. 등자의 위력은 4세기 발렌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단이 고트족에게 참패하면서 증명된 바 있다. 또한 몽골군대의 조직은 문어(文語)가 필요 없을 만큼 단순했고, 정보수집을 중시했다.

둘째, 팍스 몽골리카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직접적 관계를 처음으로 형성함으로써 유라시아 문명의 빠른 확산에 기여했다. 이란의 천문학·의학이 중국으로, 중국의 예술·농업·문물이 이란과 러시아로 전파되면서 동서교류가 대폭 증가했다. 몽골제국부터 유럽과 동아시아의 사건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글로벌 시대, 세계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중국어(한자), 일본어, 위구르어, 티베트어, 고러시아어, 조지아어, 아르메니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시리아어, 라틴어로 된 당시 자료들에 몽골족을 언급하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천하 몽골군대라도 약점은 있었으니 백병전이나 해전이었다. 몽골의 수차례 침입에도 고려 삼별초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던 이유가 그 것 아니었을까?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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