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에 매몰된 정치가 다시 소환한 ‘중도층’ [배종찬의 민심풍향계]
  •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연구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1.01.04 14:00
  • 호수 16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확한 보혁 구도로 입지 좁았던 중도층, 집권 후반기 갈수록 다시 살아나

정치적으로 나는 어떤 사람일까. 평소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정치 현안이나 선거를 마주하게 되면 소환되곤 하는 ‘정치 성향’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실시할 때 필수적으로 묻는 질문이 ‘정치 성향’이다. 보수층인지 진보층인지 또는 중도층인지를 선택하게 된다. 진보나 보수는 그렇다 치고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를 중도라고 판단할까. 정치적으로 진보나 보수, 즉 특정 성향이 지배하지 않는다고 보는 유권자들이 중도라고 응답하는 경향이 강하다.

흔히 정치 성향으로 유권자 비율을 나눌 때 보수 30%, 진보 30%, 중도 40%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중도는 정해진 비율이 아니다. 중도 중에서 좀 더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가 나누어지기도 한다. 중도진보가 많을수록 전체적인 진보 비율은 올라간다. 반대로 중도적 성향의 ‘샤이 보수(Shy Conservative)’가 보수정당으로 유입되면 보수정당의 지지율은 높아진다.

2020년 4월3일 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이수진 민주당 후보가 사당2동 주민센터 앞에서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시사저널 박정훈

중도 내 성향 분류에 따라 중도 비율이 달라지지만 중도의 가치는 비율 기준 이상이다. 특히 선거에서의 위력은 후보자들의 당락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선거 판도를 뒤바꿔 놓기도 한다. 2010년 지방선거는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반에 실시된 선거라 ‘정권 심판’과 ‘정권 안정’ 구도가 팽팽했다.

그렇지만 ‘무상급식’에 대한 판단은 달랐다. 그해 3월말 천안함 폭침 사태로 보수 쪽으로 기울어졌던 선거 구도는 무상급식 논란으로 인해 정반대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중도층이 무상급식에 더 공감하면서 선거 판세는 진보 쪽으로 역전되었다.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에서 뒤늦게 ‘유기농 무상급식’을 외쳤지만 이미 배는 항구를 떠나고 난 뒤였다. 민생 현안에 대한 중도층의 판단이 선거 판세를 좌지우지한 전형적인 사례다.

진보층이나 보수층은 정치 기반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중도층이라고 정치 세력화되지 않은 건 아니다. 이번에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선언을 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줄곧 ‘중도 정치’를 표방해 왔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선 빛을 발했지만 안 대표의 ‘중도 정치’는 지금까지는 그 효과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중도층’을 견인하는 정치 세력화가 가능하다는 점은 확인시켜 주었다.

중도층은 속성적으로 정치적 이해관계를 드러내기보다 투명한 과정과 실용적 결과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지율 고공행진을 할 때 진보층만큼이나 중도층에서 국정수행에 대한 호응도가 높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 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 국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은 중도층의 이탈이다.

윤석열·코로나 이슈에서 중도층이 ‘우향우’

중도층이 정치의 중재자로 살아 있는 첫 번째 정치 현안은 ‘윤석열 총장’ 관련 건이다. 지난 1년여 동안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과 충돌은 대한민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급기야 추 장관은 수사지휘권과 인사권을 빼들었고 법무부 징계위원회를 통해 윤 총장에게 정직 2개월 결정을 내렸다. 과정은 혼란스러웠고 검찰 개혁의 본질적인 취지를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행정법원은 윤 총장의 정직 2개월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고, 윤 총장은 다시 총장 자리에 복귀했다. 추 장관과 윤 총장의 갈등 과정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한 것은 중도층이다. 중도층은 검찰 관련 이슈에서 윤 총장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리얼미터가 YTN의 의뢰를 받아 지난 12월18일 실시한 조사(개요는 그래프에 표시)에서 추 장관이 사의 표명을 한 상황에서 윤 총장의 동반 사퇴 여부에 대해 물어보았다. ‘윤 총장의 동반 사퇴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절반이 넘는 54.8%로 나타났다. ‘동반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은 38.3%로 나왔다. 이념 성향에 따라 진보층과 보수층이 정반대로 엇갈렸다면 전체 결과를 이끌어낸 계층은 바로 중도층이다. 중도층 중에서는 65.9%가 ‘윤 총장의 사퇴가 불필요하다’는 의견으로 나타났다(그림①). 문 대통령 지지율이 높을 때나 지난해 초만 하더라도 중도층은 진보와 거의 비슷한 경향을 보였지만 2020년 하반기 들어서면서 중도층은 보수층과 더 가까운 모습이다.

두 번째로 중도층이 살아 있는 현안은 ‘코로나19’ 관련이다. 지난 2월말과 3월초 1차 대유행이 시작되었을 때나 8월말 2차 대유행이 진행되었을 때 문 대통령 지지율은 상승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K방역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차 대유행 국면에서 많은 악재가 쏟아지면서 지지율은 연거푸 하락했다. 정부·여당이 코로나19 방역으로 얻는 반사이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19 국면이 방역에서 백신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리얼미터가 오마이뉴스의 의뢰를 받아 지난 12월22일 실시한 조사(개요는 그래프에 표시)에서는 ‘코로나 백신 관련 어떤 여론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긴급성’이라는 응답이 54.9%로 ‘안전성’의 41.1%보다 더 높았다. 이 조사에서 중도층은 ‘긴급성’이라는 의견이 65.2%로 압도적이었고, 보수층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백신에 대한 인식마저 중도층이 최종 결과를 결정하는 모양새다. 진보층은 ‘안전성’이라는 의견이 73%로 정반대였다(그림②).

 

중도층, 부동산 문제에서도 더 보수적으로

중도층이 최종 여론을 결정하는 현상은 ‘부동산’ 관련 이슈에도 나타나고 있다. 김현미 전 장관이 물러나고 신임 변창흠 국토교통부 장관이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게 되었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논란이 증폭되었던 변 장관이 국민들의 부동산 정책 만족도를 얼마나 끌어올릴지가 관건이다. 오는 4월 보궐선거는 부동산 정책이 결정적이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지역이 서울이고 선거 내내 전면 부각될 이슈다.

선거는 자기 지지층에다 중도층을 조금이라도 더 가져가면 이기는 전쟁이다. 부산도 부동산 정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동래·수영·해운대구를 포함해 거의 대부분 지역이 조정지역에 포함되었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중도층이 얼마나 공감할지 여부가 핵심이다. 정부의 최근 부동산 정책인 개발지역의 시세 차익 환수에 대해 중도층은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리얼미터가 TBS의 의뢰를 받아 지난 12월23일 실시한 조사(자세한 개요는 그래프에 표시)에서 ‘부동산 시세 차익 환수에 대한 공감 여부’를 물어보았다. 전체 의견은 공감과 비공감이 팽팽했는데 중도층은 달랐다. ‘공감하지 못한다’는 의견이 54%로 보수층보다 오히려 더 많다(그림③). 개인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동산 정책에서는 중도층이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비판적이었다.

현 정부 들어 극심한 이념 대결로 보혁 구도가 명확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중도층이 유명무실해지고 정치 세력화되기 힘들다는 분석이 있었지만, 임기 후반기로 갈수록 국면은 달라지고 있다. 이념에 매몰된 양당 정치가 다시 중도층 DNA를 소환하고 있다. 중도층은 살아 있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