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3대 기록 난중일기, 징비록, 쇄미록 [최보기의 책보기]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thebex@hanmail.net)
  • 승인 2020.12.30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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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ㅣ오희문 지음·신병주 해설ㅣ사회평론아카데미 펴냄ㅣ464쪽ㅣ1만5800원

“16일 맑다. 적선 1백 30여 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 도망가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 현자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서 살 것이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중 정유재란 후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과 맞섰던 명량대첩일의 일기다. 최전선을 지휘하는 야전 사령관의 전투일지다.

"전하,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만약 대가(大駕)가 이 땅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조선은 이미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평양에 머물며 나라를 보존할 계책을 세우소서."

왜군이 북진하자 평양으로 피신한 선조가 중국 요동을 향해 더욱 북쪽으로 피신을 재촉하자 서애 류성룡이 왕에게 평양에서 전쟁을 지휘할 것을 호소했다. 선조는 유성룡의 호소를 묵살하는 대신 그를 도체찰사로 임명해 알아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다. 선조는 왜군만큼 이반된 민심도 두려워했다. 류성룡은 병역제도 등을 개혁해 민심을 다독이는 한편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 군량, 무기, 의병, 작전, 병참 등을 총괄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그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낙향해 중앙정부 최고위 책임자 입장에서 전쟁 전반의 상황을 반성과 성찰로 기록한 저서가 《징비록》이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3대 저서로《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오희문의 《쇄미록》을 꼽는다. 쇄미록(瑣尾錄)은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다. 오희문은 임진왜란 당시 토목 일을 맡은 관리였는데 지방에 사는 외거노비들에게 공물을 받을 목적으로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떠났다가 전라도 장수에서 임진왜란을 맞은 후 1601년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9년 3개월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기를 썼다. 중앙정부나 전투현장이 아닌 전후방 민초들이 겪는 전란 중 생활과 고초를 생생하게 기록함으로써 16세기 조선의 일상생활사, 풍속사, 사회경제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의 보물창고이다. 대략 아래와 같은 식으로 기술됐다.

(1592.5.25) … … 영취산의 석천사로 들어갔다. 그곳은 관아 사람들의 대피장소다… …또 들으니 왜적의 포로가 된 반가 선비의 아내가 적들이 돌아가며 강간을 하자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려다가… … 허리에 찢긴 치마만 걸쳐있을 뿐 속옷도 입지 않았는데, 우리 군사들이 치마를 들춰보니 음문이 모두 부어서 잘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주 참혹한 일이다. 고을 사람 중에 군대를 따라갔던 자가 직접 보고 와서 전한 말이다.

(1592.6.9) 이날 저녁에 대군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다. 사람들은 오직 이 전투에 기대를 걸었는데, 이렇게 더 이상 바라볼 곳이 없게 되자 상심하지 않은 이가 없다. 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전라도가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적은 반드시 가벼이 여기고 침략해 올 것이다. 어떻게 막아낸단 말인가?

(1592.8.1) 산속에 머물며 바위 아래에서 잤다. 내가 산에 들어온 지도 거의 한 달 남짓, 한가을로 접어드니 엄습하는 한기가 보통보다 갑절이나 차다. 너무도 그리운 노모와 처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여전히 보존하고 있으려나? 이를 생각하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1592.8.26) 손인의 집에 머물렀다. 적과 내통한 중을 보성군수가 사로잡아 형틀에 채워 압송했다고 한다. 이 중이 하는 말이, 금산의 왜적은 양식이 부족해 여물지 않은 벼를 베어 먹으며 연명하고 있다고 한다. 중의 이름은 성택이다. 사람들이 왜적 30명을 죽이는 것보다 이 중놈 하나를 죽이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속이 후련하다.

(1598.12.16) 생원(오윤해)의 사내종 안손이 현에서 돌아왔다. 조보를 보니 흉악한 왜적이 모두 바다를 건너갔고 명나라 수군과 우리나라 수군이 뒤쫓아 공격하여 다수의 수급을 베었다고 한다. 그런데 통제사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죽었고 전사한 수령 및 첨사, 만호가 10여 명에 이르니, 죽은 군졸도 분명 많을 것이다. 탄식할 일이다. 이순신은 난리 초기부터 전라도의 보루가 되었는데, 지금 왜적의 탄환에 죽었으니 애석하다.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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