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종주국 프랑스가 코로나 백신을 기피하는 이유
  • 최정민 프랑스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20.12.24 08:00
  • 호수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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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신뢰도와 백신 신뢰도는 연동”
마크롱 정부에 대한 신뢰도 추락이 원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런데 프랑스 국민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프랑스는 백신 종주국이다. 현대 의학의 3대 발명품 중 하나이자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백신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프랑스인인 루이 파스퇴르다. 파리 15구에는 그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연구소도 있다. 세계적 네트워크를 지닌 이 연구소의 역사는 무려 133년이다.

자랑스러운 백신 역사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은 크지만, 백신에 대한 신뢰도는 정반대다. 현재 코로나 사태는 1년 가까이 전 지구촌을 뒤덮으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12월15일 기준 프랑스에서만 무려 5만792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는 상황임에도 코로나19 종식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겨지는 백신 접종 의사를 가진 프랑스인은 54%에 그치고 있다. 절반을 겨우 넘긴 것이다. 이 수치는 11월5일 프랑스 여론조사 전문기관 ‘입소스(Ipsos)’가 발표한 결과다. 당시 15개 국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인도 87%, 중국 85%, 그리고 한국이 83%로 높게 나타났고, 전체 평균 접종 의사는 73%였다. 당시는 영국에서의 백신 접종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프랑스 중부 리옹의 상점·술집·식당 주인들이 12월16일(현지시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봉쇄 조처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연합

보건 당국에 대한 불신이 낳은 백신 거부

백신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부정적인 시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18년 영국의 자선재단 ‘웰컴’의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 중 ‘백신 안전성’에 이의를 제기한 응답자 비율은 33%로, 당시 조사 대상이던 전 세계 144개국 중에서 가장 높았다. 같은 항목의 평균 수치는 7%였다. 프랑스인들이 보이는 이 극도의 불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백신 우등생이었다. 프랑스 공영방송 ‘프랑스앵포’ 보도에 따르면, 당시 백신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반감, 즉 ‘접종 거부율’은 약 10% 선에 머물렀다. 그러나 2009년 겨울에서 2010년 봄, 인플루엔자 A형 H1N1, 이른바 ‘신종플루’ 사태를 거치며 백신에 대한 인식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피해를 우려해 신속하고 대대적인 백신 구매와 접종 캠페인을 벌였다. 그러나 당초 예상과 달리 피해 규모가 작게 나타나자 백신의 실효성 논란은 물론 무턱대고 대규모로 백신을 구매한 것에 대한 비판까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보건 당국이 주문한 백신은 총 9400만 회분이었다. 그러나 실제 접종 인구는 500만 명에 불과했다. 보건 당국이 부랴부랴 선주문의 절반가량을 취소했지만, 이미 지출한 비용만 3억8200만 유로(2010년 1월 당시 환율 기준 약 6002억원) 규모였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시종일관 미흡한 대처로 비판받았던 프랑스 보건 당국이 2009년 신종플루 사태 때는 지금과 정반대인 ‘과도한 대책’으로 도마에 올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종플루 사태와 같은 해 터져나온 이른바 ‘메디아토르’ 의약 스캔들로 프랑스 보건정책과 의약계 관행에 대한 국민적 공분은 제대로 폭발하게 되었다.

메디아토르 스캔들은 프랑스 전후 최대의 의약 스캔들로 불린다. 메디아토르는 당뇨병 환자의 비만 치료제였다. 그런데 1976년 시판된 이래 2009년까지 최대 2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논란의 핵심은 제약사인 세르비에르가 부작용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은폐했다는 혐의였다. 제대로 감시하지 않은 정부의 안일한 보건정책까지 함께 도마에 올랐다. 2010년 일련의 두 사태를 거치며 프랑스 국민의 백신 접종 거부율은 몇 년 새 40%까지 치솟았으며, 같은 해 실제 일반 백신 수요율까지 주저앉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탐탁지 않던 마크롱 정부의 코로나19 대처와 맞물려, 백신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불안과 불만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프랑스 극좌파 정치인 장뤼크 멜랑숑은 12월15일 프랑스 보도 전문채널 BFMTV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의료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영하 70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보관·운반 과정에 대해 전적인 신뢰가 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 않아도 전통적으로 의약 업계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져온 극좌파 진영에선 더욱더 거센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백신에 대한 국민의 반응이 이렇다 보니, 프랑스 정부와 마크롱 대통령은 현재 진행 중이거나 허가를 앞두고 있는 다양한 코로나19 백신들의 접종을 의무화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12월2일 마크롱은 노약자 등 위험군으로 분류되는 환자들과 의료 현장 종사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접종을 실시하고, 그 후 대규모 일반 접종을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의 담화 이후 계속해서 방송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방역 대책을 설명하고 있는 장 카스텍스 총리는 백신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거둬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장 카스텍스 프랑스 총리가 12월3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열고 코로나19 백신 전략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EPA 연합

정부 코로나19 대처에 대한 신뢰도 39%

12월15일 프랑스는 3주간의 이동제한령을 해제했다. 전면적으로 해제한 것은 아니다. 이동제한령을 해제하는 대신 저녁 8시에서 새벽 6시까지 이동이 금지되는 야간통금을 실시했다. 이번에 실시되는 야간통금은 성탄절 전야인 24일 하루만 예외가 인정된다. 당초 프랑스 정부는 성탄 전야인 24일과 새해를 맞이하는 31일 이틀간은 야간 이동을 허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크롱이 목표치로 잡았던 ‘하루 확진자 5000명 수준’에 전혀 도달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 이어지자, 성탄절 이브인 24일만 야간통금을 해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프랑스는 11월24일부터 실시되고 있는 식당·카페·바 등의 영업금지 조치로 그 어느 때보다 암울한 연말을 맞고 있다. 더구나 오는 1월20일까지로 예정됐던 영업금지 기간마저 연장될 수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며, 요식 업계 종사자들의 실망이 분노로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19 확진자가 줄어들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도, 백신에 대한 신뢰도는 높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프랑스 언론들은 백신에 대한 신뢰도는 정부에 대한 신뢰도와 연동한다고 지적한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을수록 백신에 대한 수용 의사도 강해진다는 것이다. 지난 11월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의 코로나19 대처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신뢰도는 39%까지 내려앉았고 이 역시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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